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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빈 Jan 03. 2021

왜 웃었어?

돌이켜보니 웃길 만도 했네.




변태를 가장 많이 본 게 언제였더라? 아마 학창 시절이지 않을까. 내가 고3이던 시절엔 mp3 플레이어가 유행이어서 학교 등하굣길, 학원 등 하원 길엔 항상 이어폰을 꽂고 다녔다.


심지어 고3 수험생 시절엔 노래를 좀 더 들어보겠다며 밤 12시가 넘어서도 학원 차를 안 타고 집까지 걸어오곤 했는데 캄캄한 밤 홀로 집으로 걸어가며 듣는 그 2~30분의 음악 타임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종의 관행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위험했을 법도 한데 그 당시에는 외진 골목에 가로등도 별로 없었고 cctv 설치는 말할 것도 없지.




어쨌든, 그날 학원에서는 12시를 훨씬 넘긴 아주 늦은 시간에 끝이 났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차를 타고 귀가하는데 학원을 같이 다니는 옆집 남자아이가 같이 가자는 것도 만류하고 홀로 어둡고 축축한 골목길에 혼자 들어갔다. 나의 mp3 플레이어와 함께.



당시 그 골목 왼편에는 낡고 오래된 아파트 담벼락이 있었고 오른편엔 그것보다 더 오래된 다세대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 골목은 고등학생의 걸음으로 10분 정도 걸어가야 끝이 났는데 그 골목의 모퉁이를 돌아서 또 10분을 걸어가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모퉁이를 돌기만 하면 어두운 골목보다는 밝은 가로등이 더 있어서 무섭지 않았는데 그 골목엔 가로등이 한두 개뿐이라 밤이 내려앉으면 아주 캄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난 왜 그 골목에 들어갔을까? 어둡고 음침한 그 골목을 지나며 나는 더 어두운 발라드 음악을 들었다. 골목의 절반을 지나 모퉁이가 시야에 보일 때쯤, 다세대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그 집들 사이에서 나는 한 남자가 자신의 그것을 내어놓고 자기 위로를 하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았다. 나는 음악을 듣고 걸으며, 숨이 탁 멎는 그 찰나의 순간에 남자의 행위와 그의 얼굴을 보았다. 이 모퉁이만 지나면 곧 우리 집인데. 모퉁이가 바로 앞인데.



그는 자기 위로를 하며 내 뒤를 따라 걸어왔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피해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왼손으로는 주머니 안에 있던 mp3 플레이어의 정지 버튼을 감으로 찾아 눌렀고 오른손으로는 반대편 주머니 안에 있던 폴더폰에서 1번을 찾아 꾹 눌렀다.



1번은 엄마였다.



어두운 골목이 끝이 나고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며 엄마와 통화를 했다. 내 뒤에서 그가 나를 따라오는지, 아니면 이미 그의 행위가 끝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집 앞에 다다르자 엄마가 절구 방망이를 들고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엄마도 놀랐을게 뻔하다. 모르는 남자가 고등학생 딸의 뒤를 쫓아온다는데 안 놀랄 부모가 있을까?



그렇게 놀란 가슴에 뛰쳐나온 엄마를 보자마자 나는 “어떤 미친놈이 딸딸이 치면서 따라와!”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엄마가 박장대소하며 웃기 시작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라며 웃는데 ‘나는 지금 너무 심각한데 엄마는 왜 웃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어리다고 생각했던 딸이 그런 단어를 사용한 게 엄마는 아주 웃기다고 느꼈던 것 같다.


지금은 나도 엄마가 되었다. 아이는 훌쩍 자라 8살 초등학생이다. 요즘 이 녀석이 브롤 스타즈라는 게임에 푹 빠져 공부만 다 했다 하면 태블릿 pc를 들고나가버린다. 놀이터에서 동네 형과 친구들을 만나 게임을 하는 것이다.



오늘은 아들이 자기 전에 오늘 놀이터에서 진짜로 ‘미친’ 할아버지를 봤단다. ‘미친’이라는 단어를 쓴 게 거슬렸다.


“왜 미쳤는데?”라고 내가 물었다.

“아니, 나랑 형아랑 친구랑 게임하는데 그 할아버지가 우리한테 개... 개... 개새끼래”라고 하는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들이 개새끼라는 단어를 쓴 게 나는 너무나 웃기고 어이가 없어서 깔깔 웃는데 아들 표정이 고3 때 모퉁이를 돌아 뛰어오던 내 표정과 너무 닮아있다. ‘나는 할아버지가 욕해서 놀랐는데 엄마는 왜 웃지?’라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잊고 있던 고3 때의 기억이 머릿속을 쓱 훑고 지나갔다. 어두침침한 골목, mp3 플레이어에서 나오던 어두운 발라드 음악, 남자, 그리고 절구 방망이.




나는 이제 그때의 엄마를 이해한다. 내 자식이 놀랐을 거야, 무서웠을 거야. 그런데 그런 단어를 쓰다니. 많이 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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