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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enet Nov 07. 2019

오토픽션에 대하여

auto(자전) 더하기 fiction(허구), 오토픽션(autofiction)이란 무엇인가. 세르주 두브로브스키의 <le fils>에 의해 본격적으로 문학계에 던져진 이 신조어는 문학계에 많은 논쟁들을 불러일으켰다. 필립 르죈이 제시한 자서전의 규약 (Le pacte autobiographie) 9칸 중 ‘있을 수 없는' 케이스, 즉, case aveugle로 비어있는 그 칸을 채우는 장르 즉, 소설도 자서전도 아니며, 소설이자 자서전이 되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진정성과 허구성이라는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 요소가 공존하는 이 문제적 장르는 장르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논쟁에서부터, 해당 장르적 당위성을 허구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 자전성에 초점을 맞추어야하는가에 대한 논쟁들과 같은 수많은 논쟁들을 낳게 된다.


 진실이 아니면서도 거짓은 아닌, 거짓이면서도 진실인 오토픽션의 애매성, 여기에서 오토픽션의 현대성을 찾아볼 수 있다. 자전성과 허구성의 명확한 관계가 허물어지는 이 애매성은 자아의 타자성, 언어의 불환원성, 재현의 불가능성을 담고 있다. 언어, 즉, 시니피앙은 항상 지시하는 대상, 시니피에에 정확하게 도달하지 못하고 그 밑으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실제로 경험한 것이라 해도 그 장면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다. 물론 기억의 한계와도 같은 현실적인 제약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언어로 무엇인가를 재현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왜곡이 뒤따를 수밖에 없고 또한 그 언어를 사용하는 개인에 의한 은폐와 기억의 부분적인 부재가 불가피하게 동반되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낸다는 것은 사실 상 불가능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아의 타자성, ‘내가 나를 모르면 누가 나를 아는가?’ 우리는 나 라는 주체와 자아 간의 간극을 부정하고 나와 관련된 진리와 경험의 절대자는 나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직접적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거울이라는 수단을 통하거나, 혹은 타자가 나를 바라보는 그 눈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얼굴을 보게 된다. 다들 한 번씩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거울로 보는 나의 얼굴과 사진을 통해 보는 나의 얼굴이 이질적으로 느껴진 그런 경험. 결국 우리는 자아를 매개체를 통해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모습에는 반드시 왜곡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결국, 내가 아는 나의 진실이란 어느 정도 진실지만서도 동시에 거짓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에 대한 완벽한 진실의 글이란 것은 있을 수 없고, 모든 내가 나에 대해 쓰는 글은 필연적으로 허구를 동반한다.  


오토픽션에서 보여주는 거짓을 동반한 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과거의 유령들의 흔적을 그대로 쫓아가며’ 얻은 진실이 아닌 내가 획득해 나가는 나의 진실이다. 세르주 두브로브스키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을 치료하기 위해 오랫동안 정신분석 상담치료를 받았는데, 두브로브스키의 치료사는 두브로브스키에게 침대 옆에 노트를 두고 꿈에서 기억나는 내용들을 모두 받아 적는 방법을 치료방법으로 제시했다. 이렇게 자신의 무의식을 쓰고 관찰하는 과정에서 두브로브스키는 자신의 상실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고, 이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글쓰기가 정신분석 치료 과정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 최초의 오토픽션 <le fils>이다. 즉, ‘내’가 나 자신의 치료과정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좋은 분석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내가 아는 나의 진실을 획득해나가게 되고 이 진실을 획득해나가는 과정이야말로 ‘나’의 아픔, 상실, 고통을 치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에 오토픽션의 진실은 나를 치유하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오토픽션은 어떻게 써야하는가? 오토픽션에는 한 가지 지켜야하는 규약이 존재한다. A=N=P의 일치, Auteur(저자), Narrateur(서술자), Personne(주인공)이 동일한 정체성을 유지해야한다는 것이다. 오토픽션은 두브로브스키에서 콜로나, 르카름, 다리외세크와 같은 연구자들을 거치며 새롭게 정의되고 그 범위를 확장시켜왔지만 작가의 실제 정체성을 고수하는 A=N=P는 여전히 오토픽션을 규정하는 규약으로 여겨지고 있다. 현존하는 오토픽션의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바르트의 <Roland Barthe par Roland Barthe>(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사르트르의 <les mots>(말), 콜레트의 <naissance du jour>(여명), 프루스트의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오토픽션의 주된 논의는 물론 허구성의 문제, 즉, “자기 허구화” (la fabulation de soi) 장치를 사용하여 새로운 인격과 실존을 가공하는 것을 과연 오토픽션으로 볼 수 있는가, 또 어디까지 그 범위를 한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논의는 조금 뒤로 밀어놓기로 하고, 나는 오토픽션의 허구성이 지니는 자전적 글쓰기의 매력에 대해서 논하고 싶다. 오토픽션의 허구성이 지니는 가장 큰 매력은 허구라는 그늘 아래 저자가 강박적인 자기검열과 변명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의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어떤 누구에게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자전적 문학작품들은 자기방어적인 변명과 거짓말로 그 장르의 가치를 떨어트리게 되고 마는 슬픈 결말을 맺게 되는 듯하다. 자전적 문학작품의 대표작인 루소의 <회고록>과 같은 작품을 예로 생각해보자. 루소는 진실을 고백한다는 그 무서운 사실에 과하게 매몰된 듯하다. 자신의 과오에 대한 구차한 변명과 자기위로로 점철된 이 거짓말의 기록은 소설보다도 더 소설에 가까웠던 터라 루소가 진실이라 우기고 있는 ‘픽션’ 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우리는 오히려 소설의 허구에서 저자의 자전적 진실을 더 자주 발견하기도 한다.


나의 열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1935년 이전에는 나오지 않으리라, 1930년경이 되면 그들은 안타까워하기 시작하고 서로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
 “그 사람은 시간을 무척 잡아먹는군. 25년 동안이나 먹여살려왔는데 아무 일도 안 해놓다니! 그 사람의 책도 읽어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죽지나 않을까?”
그러면 나는 1913년의 목소리로 “여보세요, 아직 좀더 공부할 시간을 주어야죠.”라고 대답하리라


      

위는 사르트르의 소설 <les mots>에 삽입된 구절이다.(한국에는 이 작품이 자서전으로 알려져 있는데 갈리마르에서 출판 당시 이 작품은 roman(소설) autobigraphique(자전적) 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사르트르가 꾸며낸 이 허구의 '말들'은 현실의 시공간 속에서  실제로 발화되었을 사르트르의 실제의 '말들'보다 더 진실에 가까이 서 있는 듯 보인다. 거짓이라는 가면 뒤에서 비로소 진실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이것이 오토픽션의 허구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다. 독자와 저자 사이에 거짓이라는 한 겹의 얇은 베일을 두름으로서 비로소 저자는 거추장스러운 거짓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헐벗은 몸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독자의 입장에서, 거짓인지 진실인지 경계가 애매한 이 오토픽션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이 진실인가 아닌가를 추리하게 만드는 색다른 재미 또한 제공한다. 글을 읽는 내내 독자 역시 진실에서도 허구에서도 자유롭다. 진실이라 믿고 싶은 부분만을 진실이라 믿으면 되고 허구라 믿고 싶은 부분은 허구라 믿으면 된다. 여기에선 무엇이 실제로 일어났던 진실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걸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오토픽션은 저자와 독자가 살아 숨 쉬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생동적인 장르다.

 

나의 글들 또한 어떤 것은 진실이고 어떤 것은 진실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나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내 경험이라 우기는 것이 나의 것일 수도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밝힌다. 나는 나를 좀 더 객관화하고자, 또 소설이 주는 재미를 조금 더 살리고 싶어서 의문의 서술자를 사용했다. 나는 주인공이 누군지에 대한 작은 힌트들을 여기저기에 숨겨두었는데 이 글을 읽을 누군가가 이를 찾으면서 재미있어했으면 좋겠다. 또 말하는 서술자는 내친구일수도, 내 애인일수도, 전혀 모르는 제 3자일 수도 있지만 저자이자 주인공인 나 일수도 있다. 나 역시도 저 서술자가 누군지는 모른다. 나는 내가 나름 제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겪은 얘기들을 이 글을 읽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을 뿐, 나머지는 글을 읽을 누군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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