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후 남겨진 마음의 청구서

너의 흔적들을 정리하며

by 분노의 토마스
IMG_1235.jpg 2022년 1월17일, 미용 후 증명사진 컨셉으로

순대야,


매일매일 너와의 이별이 남긴 청구서를 받고 있어. 사랑한만큼 갚을 빚도 크다. 너의 흔적들을 정리하며 사랑보다 몇배가 길지 가늠이 안되는 이 이별을 어떻게 갚아 나가야할지 고민중이야.


네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은 아직도 거실 탁자 안에 고이 잠들어 있고, 네가 먹던 껌도 아직 주방 한구석에서 널 기다리고 있어. 조금이라도 아픔의 무게를 덜고 싶은 마음에 너의 물건들을 모아 다 태우려고 마음 먹었는데, 태울 수 없겠더라. 너의 흔적들을 다 지우고 나면 네가 세상에 없었던 존재처럼 될까봐. 너가 우리 곁에 남기고 간 감각들, 잔해라도 더듬거리고 싶은 날을 위해, 아파도 꺼내보고 울고 싶은 날이 올 수도 있잖아.


대신 우리는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빚을 갚아나가고 있어. 네가 쓰던 물건들은 필요한 강아지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어. 그게 네가 좀 더 원하는 방법이지 않을까 해서. 어쩌면 너에 대한 글을 이렇게 남기는 이유도 애도이자 채무 상환의 일부인것 같아.

IMG_6804.HEIC 2023년 10월17일, 너의 트레이드 마크 과점퍼를 입고

함께한 이야기가 너무 많이 묻은 물건들은 하나하나 예쁘게 개어서 지퍼백으로 잠궜어. 네가 우리 곁에 있엇던 기억들이 증발하지 않도록 꼭꼭. 겨울마다 야무지게 입어서 헤져버린 너의 무스탕 하네스, 백수시절 없는 돈 싹싹 털어서 입혔던 강아지 과잠바, 너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핑크색 후리스, 입으면 후랑크 소세지 같아보였던 주황색 패딩. 이 옷입은 너를 다시 한번만 더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너를 위해 사뒀던 간식과 사료들은 쿠노에게 줬어. 숨이 가빠 네가 차마 목 뒤로 넘기지 못해 가버린 간식들. 백수시절, 돈 벌면 꼭 너에게 사주겠다 되뇌인 멋진 모양의 간식들. 치킨, 피자, 타르트, 휘낭시에 하나도 못먹고 가버린게 너무 아쉬워. 마음이 약해 맨날 몰래 간식을 챙겨주던 엄마한테 너 살찐다고 조금만 주라고 구박 했는데, 사람음식 주면 안된다는 핑계로 매번 너 조금 나눠주라는 말 못들은 척 넘겼는데. 낫또를 그렇게 좋아하던 너가 가버린 뒤, 나는 낫또 한 박스를 평화롭게 혼자 먹을 수 있게 됐어. 귀찮게 나눠줄 사람이 없어지면 편하게 먹을줄 알았는데 자기도 달라고 박박 긁는 잔소리가 없어지니 자꾸 목에 가시가 낀 것처럼 걸려서 안넘어가.


언젠가 너가 떠나는 날이 가까워지면 초콜릿이던 아이스크림이던 강아지라서 못먹고 간 한 없게 실컷 주겠다고 했던게 엄마 마음에는 가시로 남았어. 사료는 안먹고 간식만 먹으려고 뺀질 거리던 너, 배부르면 안먹으면 될 텐데 사방 돌아다니면서 간식 숨길 곳을 찾던 너, 혹시 내가 간식을 훔쳐먹을까봐 노심초사 간식을 지키던 너. 주인 잃고 남겨진 너의 간식들이 유난히 아프더라. 매번 그만 먹으라고 말해서 미안해. 네가 쓰던 밥그릇과 사료들을 정리하며 네가 꼭 내 딸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기도했어. 그때는 강아지라서 못먹는다는 말 대신에 먹고 싶은거 실컷 다 먹게 해줄게.

IMG_3332.HEIC 2024년 10월9일, 가을길을 산책하는 너의 모습

아픈 너를 더 많이 산책시켜주고 싶어서 샀던 새 유모차는 애플이한테 갔어. 혹여나 가버린 너가 남긴 물건이라 싫어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는데, 다행히 잘 쓰겠다는 얘기를 들었어. 고마운데 아프고 슬픈 마음, 한편으로는 네가 이렇게 마냥 사라지는건 아니라는 다행스러운 마음이 교차해서 지나갔어. 선선한 가을이 오면 귀를 팔랑거리면서 은행 냄새를 맡던 너. 너를 태우고 함께 걷고 싶었던 가을의 길을 누군가가 대신 걸어주겠다는 말만으로도 마음 한 켠에 위로가 되더라.


너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문득 사랑과 행복도 크기나 무게로 측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순간부터 11년의 시간을 거꾸로 걸어보곤 해. 2014년 2월의 어느 눈 내리는 밤, 패딩 점퍼 안에 너를 숨기고 라면을 먹었던 사거리의 편의점. 갑갑한 점퍼를 버티지 못하고 튀어나온 너를 보고 인형인줄 알았다고 놀라던 주인 아주머니는 아직도 너를 기억한대.


너의 물건들을 보며 너가 우리의 가족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행복할 수 있었던 시간들을 돌아봐. 기억들은 놀랄만큼 작고 평범해. 너에게 항상 큰 이벤트를 해주겠다는 말로 빚을 졌는데, 남은 것들은 다 일상의 작고 작은 순간들이더라. 유튜브에 나오는 멋진 장소들을 데려가는거 보다 네가 좀 더 내 곁에 오래 붙어 있을수 있게 자리를 내어주고, 안아달라고 할때 조금 더 오래안고, 같이 나가고 싶다고 할때 한번이라도 더 콧바람을 쐬게 해주는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을 텐데. 문득 이별을 느낀 여름 어느 날, 나는 너와 조금 더 오래 붙어있기 위해 샀던 침대용 탁상을 샀었지. 써보지도 못하고 목적을 잃어버린 탁상을 볼때마다 그리움의 청구서가 마냥 쌓여가고 있어.

E8B63F2E-DA94-4EBE-BA96-979E401F4C24.JPG 2021년 1월4일, 공룡에게 잡아먹히는 모습.

너의 작은 행동에 웃었던 순간 한 알, 너가 우리와 감정을 나눈다는 것에 위로 받았던 순간 한 알, 한결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너와 마주쳤던 현관문에서 한알, 너와 함께 가을 바람을 쐬며 더 먼 미래를 상상했던 산책길에서 한 알. 그 순간들을 구슬처럼 알알이 꿰어보곤 해. 꿰어놓고 싶은 순간들이 기억 위로 떠오를때 마다 급하게 펜을 들고 수첩에 적어둬. 네가 더 이상 우리를 뒤돌아보지 않아도 되는 날, 네 목에 걸어줄 목걸이를 만드는 느낌으로.


네 몸을 빙빙 백번은 더 두를 멋진 목걸이가 됐음 좋겠다. 더 이상 아프지 않고, 약하지 않은 강아지가 되었으니 무거워도 거뜬 하게 날 수 있을거야. 강아지 별에 가면 네가 친구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멋진 목걸이를 만들어줬다고 자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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