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유리조각처럼, 추억은 안개처럼

부재의 언어를 배우는 시간, 그리움이 시간을 건너 추억이 되기까지

by 분노의 토마스
33B3DCEA-CC4D-4C38-881C-111982BBF67D 2.JPG 2022년 9월9일 더위가 가시지 않은 오후 한때

순대야,


의사 선생님이 언젠가는 웃으면서 너와의 기억을 꺼낼 날이 올거래. 그런 날이 올까, 진짜 그럴 수 있을까.


비현실적이었던 장례식이 끝나고 너는 보라빛 보자기에 싸인 채 내 현실에 돌아왔어. 나는 너 없는 일상에 첫 발을 내딛는 중이야. 네가 남긴 유리파편들이 내 일상 곳곳에서 반짝반짝 빛나. 가시덤불이 되어버린 내 평범한 일상.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너와의 기억들이 날카롭게 마음을 찔러.


그만 아프고 싶어서 너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그럴수록 너와의 기억 속에 더 깊게 잠기게 돼. 기억은 갈수록 반짝거리고, 반짝이는 만큼 아파. 이렇게 나는 부재가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 얼마나 아픈지를 배워가고 있어. 이젠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겠지. 나를 버티게 하던 너를, 이제는 버텨내야 살 수 있대.

IMG_4971.HEIC 2023년 7월17일 침대에 누워 기다리는 너의 모습.

익숙한데 낯선 너가 없는 우리집. 우리는 떠나버린 너의 기척과 향기를 목격해. 어제는 아빠가 출근길에 너가 멍 하고 짖는 소리를 들었대. 나도 오늘 너의 총총거리는 발 소리를 들었어. 화들짝 닫힌 방문을 열고 명치부터 올라오는 서러움을 끌어다 네 이름을 불러봤어. 원래 너는 한번 부르면 안오는 애니까 두번 세번 네번 끝없이 되뇌여봤는데 답이 없어. 부재도 대답이라면 대답인걸까. 아무래도 나는 너를 부르는 법을 새로 배워야 할거 같아.


너가 늘상 누워있던 소파 모서리, 공기청정기 뒤 쿠션, 엄마의 이불 옆자리. 네가 으레 있어야할 자리에 다시는 네가 올 수 없다는 걸 매 순간 깨달아. 네가 없으니 우리의 일상이 단순해졌어. 이제는 누구도 내 방문을 귀찮게 두드리지 않고, 내가 나갈때 마다 뒤따라오던 잔소리도 없지. 수상한 인기척에 짖을 네가 없으니 난 이제 새벽에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어. 더 이상 강아지 간식을 사러 먼 카페에 가지않고, 집에 일찍 들어가려고 서두를 일도 없어졌다.


집에 들어가기 두려워 집 앞을 서성거리는 시간이 늘었어. 날씨가 아직 더운데, 너는 잘 가고 있을까. 이번 여름,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던 네 모습이 떠올라. 에어컨 바람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누워있던 너의 모습. 그게 너의 몸이 보내는 신호였을텐데 그걸 왜 몰랐을까. 오목하게 파인 에어컨 밑 쇼파 자리를 볼때 마다 너의 기억들이 날카롭게 빛나더라. 그 흔적들이 너무 아파서, 너 없는 집이 아파서 발이 아파오고 땀이 줄줄 흐르는데도 마냥 걸었어.


마음이 자꾸 유리밭을 뒹굴어서 의사선생님을 찾아갔어.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들. 너의 죽음이 전부 내 탓인것만 같아 마음이 까맣게 타버렸다고, 너 없이 살아가는게 너무 막막하고, 앞으로 슬픔이 얼마나 더 커질지 두렵다고 털어놨어. 선생님은 감정은 영원하지 않다고 했어. 언젠가는 너의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수 있는 날이 올거라고, 가족들이랑 더 많이 너와의 추억을 나눠보래.

IMG_2542.JPG 2025년 7월20일 방문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너의 모습.

너에 대한 기억에 붙은 아픈 감정들을 떼어내는데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까. 내가 울때 핥아줄 존재가 없어져서 먹먹해. 시간에 상관없이 현관문 앞에서 누가 날 반기고, 우울한 날 누가 따듯하게 등을 맞대어 줄까. 너가 떠나기 몇일 전 먼 여행길에 내 기억을 담아가려는 듯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너의 반짝거리는 까만콩 두개, 가만히 곁에 다가와 안으라고 부비던 포근한 엉덩이, 따듯했던 그 체온과 촉촉했던 혓바닥이 아파지지 않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너를 기억하는 일이 아픔이 아닌 행복이었으면 좋겠다. 너를 기억할때 눈물이 아닌 잔잔한 미소가 먼저 피었으면 좋겠어. 슬퍼하는 우리의 모습이 즐거운 너의 여행길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거든. 그런데 너에 대한 기억이 추억이 되는 일은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릴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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