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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Jun 12. 2019

권리장전2019원조적폐 일당 1만원 사태를 지켜보면서

 <권리장전>은 2016년 블랙리스트가 터졌을 때부터 <권리장전_검열각하>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연극 페스티벌이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이하여 운영위는 '적폐'라는 주제로 축제를 열었다. 그런데 축제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6월 11일 오전 12시경, 페이스북 <대학로X포럼>에 해당 축제에 참가하는 극단이 오퍼레이터를 열흘에 10만 원으로 구하고 있다는 제보글이 올라왔고, 곧이어 축제의 예술감독과 해당 극단의 대표가 사과글을 올렸다. 권리장전2019원조적폐 명의로 페이스북에 입장 표명 글이 올라왔고 사태에 최종적인 대처로는 미흡한 글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것이 급하게 쓴 글이라 보았고 이번 사태를 계기로 연극계 전반에 인력 고용을 위한 임금 문제 및 경제적 생태계 문제까지에 대하여 오히려 이 축제에서 논의를 이끌어 나갈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물론 아직 이렇다 할 후속 조치들이 예고된 것은 없어 보였지만, 사태는 그런 식으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서 페이스북을 다시 들어가 보니, 생각보다 많은 연극인들이 제보자의 취지는 물론 축제 운영위와 해당 극단 대표의 입장과는 다른 의견들을 올렸고 좋아요를 누르면서 아마도 연극인일 사람들은 제보글보다도 그런 글들에 더 많은 호응을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나에게 꽤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이들이 이번 사태가 자신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어떤 고민거리를 주었는지 생각하기보다는 단지 사태를 일축시키고 더 나아가 이러한 고민과 논의를 <권리장전> 혹은 연극계 전체를 향한 위협 및 가해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방어태세를 취한 것이었다.


 맨 처음 제보자의 글을 보면, 물론 그가 제기한 문제는 열흘에 10만 원이라는, 즉 일당 1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페이에 관한 것이었다. 제보자가 본 글은 아마도 구인공고에 올라왔을 것으로 추정되며, 즉 아는 사람이 아닌 외부 인력을 모집하는 공고였을 것이다. 친한 사람한테 부탁해서 열흘에 10만 원 받고 오퍼레이터 좀 해달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사실 나는 그렇게는 하지 못할 것 같다) 외부 인력을 열흘에 10만 원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니, 솔직히 친한 사람이든 처음 보는 사람이든 어떤 타인의 하루를 1만 원으로 빌린다는 것은 무리이지 않을까? 그것은 누군가가 그 조건에 동의를 하더라도, 그 사람은 물론이고 해당 작품 및 고용 당사자의 가치까지도 평가절하하는 것이지 않을까? 어려운 연극인들의 삶에서 희망을 고갈시키는 것이지 않을까? 더 나아질 수 있는 가능성에 제동을 거는 것이지 않을까? 과연 열흘에 10만 원은 정말 최선이었을까? 그런 조건의 공고를 이제는 우리가 공공연하게 보지 않아도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제보자도 그런 마음으로 제보했을 것이며, 극단 대표와 운영위 측에서도 그 부분에 동의를 했기 때문에 사과를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이 제보가 상당히 재밌었는데, 왜냐하면 우선적으로는 이러한 문제제기는 연극계라는 추상적이고 느슨한 공동체의 경제 생태계를 조금 더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라고 보았기 때문이고, 추가적으로는 '원조적폐'라는 타이틀로 연 축제에서 이러한 아주 오래된, 아마도 대한민국 예술계 어디에서나 있어왔을 권위주의, 성차별주의와 더불어 가장 오래되었을 적폐 중 하나인 인력 경시의 문제가 직접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적폐라고 부르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대뜸 예술을 노동으로 볼 수 없다느니, 아니면 현실적으로 연극을 어떻게 근로기준법을 실현하며 제작할 수 있냐느니, 페이가 마음에 안 들면 안 하면 되는 것 아니냐느니 하면서 반론을 제기하는데, 물론 이러한 반응은 원래 문제제기의 취지를 왜곡하는 것임과 동시에 흥미롭게도 자신들 안에 있는 패배주의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연극인들은 더 나은 환경에서 예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게 만드는 것에는 국가적 지원의 부족이 있을 수도 있는 만큼 개개인의 관성에의 복종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적폐는 국가사회적 환경에 있을 수도 있고 개개인의 마음속에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이 예술이라는 본질적 특성 안에 내재해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술을 굳이 노동과 구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술을 근로기준법의 영향 아래에 두지 않겠다는 의도와 정당하거나 최소한의 보수와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 따위의 논의를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예술을 노동과 구별하려는 것은 예술을 신화화하고 물화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돈을 받으면서 예술하는 것을 비순수하다고 부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돈을 받지 못하고 예술을 하고 있는 그들 자신에 대한 연민을 넘어서 그런 그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순수성이라는 신화로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노동을 생존을 위해서 하거나 사치를 위해서만 하는 행위인 것처럼 여기면서, 예술과 노동이라는 이분법을 공고히 하려 한다. 그러한 논리에 따르면 돈을 받고 하는 행위는 수동적이며 돈 없이 하는 행위에만 순수한 능동성이 부여된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적폐는 우리가 이제껏 해온 방법이 부조리한 방법이라는 것을 인식 못하는 것이며, 그것을 더 나아지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고 체념하는 것이며, 부조리함을 긍정해내기 위해서 예술을 신화화하려는 것이며, 우리가 내세워왔던 가치가 우리의 부조리한 방법과 필수 불가결하게 관계되어 있다고 거짓 증언하는 것이며, 바깥의 부조리에 대항할 때 얻어낸 연대를 우리 안의 부조리가 드러날까 봐 내세우는 것이며, 더 나은 방법을 강구하면서는 우리가 예술을 해내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바로 그 두려움이다.


 우리는 더 나은 환경과 방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나 사회에게도,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도 말이다. 이것은 내가 <권리장전2017국가본색>에서 관객수다로 활동하며 모든 작품을 볼 때마다 아쉬웠던 지점이었다. 20여 개의 극단들 중에서 국가에게 예술가 혹은 연극인을 위한 더 나은 환경을 요구하는 극단은 (내 부족한 기억에 의하면)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자신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는 극단 또한 없어 보였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세계 어느 나라의 어느 직종의 노동자들 중에서도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부당한 계약에 스스로 동의하고서 일을 시작했을 것이다. 일단은 해야 하니까. 나는 대부분의 예술가들도 그렇게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일단은 예술을 해야만 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우리는 어떤 생태계에 입장하게 되고 그 환경을 바꿔나가는 권리와 책임까지도 부여받는다. 우리 중 대부분은 그 방법을 모르고 미숙하며 용기가 없기도 하다. 하지만 국가나 사회나 환경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은 행동하는 소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문제를 제기하고 고발하며 호소한다. 이건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다만 우리가 바로 그 소수의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자꾸 더 깊숙하게 박혀있는 적폐를 찾아내야 하고 스스로를 가리킬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적폐는 청산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가리킨다면." <권리장전2019원조적폐>의 캐치프레이즈다. 하지만 적폐는 가리키기만 해서 청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감히 못 가리켰거나 혹은 애써 가리키지 않아 왔던 것이야말로 적폐이지 않을까. 적폐는 쉽게 청산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쌓여온 것일 테니 말이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연극에 대한 절실함으로 공연을 해온, 그렇지만 미처 극단 구성원 혹은 스텝들에게 충분한 임금을 지급하지 못한 적이 있었던 연극인들에게는 이번 사태가 특히 더 가슴 아플 것이다. 그들에게 미안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두려울 것이다. 자신들에게 연극을 더 이상 하지 말라고 다그치는 것 같아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혹은 황당할 수도 있겠다. 자신들의 현실적 상황을 전혀 모르고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것같이 보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제기가 작게나마 공론화될 때, 그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조금 더 발전할 기회를 얻고 실제로 조금 더 발전한다. 우리 모두는 조금 더 조심할 것이고 조금 더 급여에 신경 쓸 것이며 조금 더 좋은 공연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할 것이며 조금 더 효율적인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작품에 대해서 생각할 것이며 마음속에 조금 덜 불편함을 가지고서 공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부디, 문제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강요하거나 연극계 현실을 모른다고 하거나 <권리장전>의 역사가 어떤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고 감성에 젖어 으스대지 말자. 적폐를 적폐라고 부르자. 그것은 여러 가지 의미로 힘이 드는 일이지만 누구도 다치지 않는다. 논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우리, 일당 1만 원에 모르는 사람을 데려다 써도 될 만큼 우리의 작업이 미천하다고 믿지 말자. 그런 구인 공고가 괜찮다고 여기지 말자. 서로의 존엄을 지켜내자. 이런 사태를 반겨보자. 해결책이 없더라도 논의를 다시 시작해보자. 용기를 내라 연극인들.


추신.

 그럼에도 사태는 이렇게 어물쩍 마무리돼서는 안 된다. 공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해당 극단 내에서는 왜 인력 구인이 어려웠고 충분한 예산은 왜 사전에 마련되지 못했으며, 이러한 구인 방법 및 계약 조건이 관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재고해볼 필요가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방법에 대해서 극단 구성원들과 토론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들을 정리하여 발표한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박수 칠 것이다. 그때, 그들은 이 오래된 문제에 관하여 누구보다 큰 발전을 하는 극단이 될 것이다. 축제 운영위 차원에서는, 그들 스스로가 밝혔듯이 이 문제의 원인이 한정된 예산에 따른 것이라면 그에 대한 대안책은 어떤 것이 있을지 차후에 발표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창작자에게 지원금을 주지 못하는 연극제에 대한 근본적 재고도 필요할 것이고, 연극 생태계에 대한 폭넓은 논의라도 축제 차원에서 기획하여 행동하려 한다면 축제 자체의 질 또한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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