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한국에서는 최초로 세계농아인대회가 개최되었다. 세계농아인대회는 세계농아인연맹(WFD)에서 4년마다 개최지를 바꿔가며 여는 대회로, 올해는 한국의 제주도에서 대회가 열렸다. 말 그대로 전 세계의 농인들이 모여 각국의 농 인권의 현황을 비롯한 여러 가지 농인과 관련된 경험과 연구들을 공유하는 자리다.
참가비가 45만 원이라는 점, 거기에 항공료와 숙박비가 추가로 든다는 점이 대회 참가를 망설이게 했지만, 전 세계 농인들의 고민과 농사회의 과제들, 연구들, 즉 농인들의 다양한 모습들과 한계들, 그리고 가능성들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자 참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아마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 한국에서 이 대회가 또 열리진 않을 것 같다는 점 또한 참가를 결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분야들이 있었고, 매일 그날 열리는 강연들 중 보고 싶은 강연을 체크해두고는 했다. 하루에 두 번 열리는 주제 강연을 제외하고는, 따로 떨어진 3개의 공간에서 동시에 각각의 강연들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보고 싶은 강연들이 겹칠 경우 하나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래에 적을 강연들에 대한 간략한 내용은 이번 세계농아인대회가 다룬 주제들의 일부일 뿐이며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가 반영된 제한적인 내용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두고 싶다. 또한, 그에 대한 서술들은 당연히 나의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며 거기에는 나의 수어 실력의 한계와 농사회에 대한 인식의 부족에서 비롯된 오류와 오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양해를 구하고 싶다. 그럼에도 그런 점들을 무릅쓰고 기억을 더듬으며, 몇 가지 부족한 견해까지 덧붙이며 이번 세계농아인대회에 대한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이 경험을 더 오래 잘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들과 이것을 나누고 싶기 때문이다.
0. 풍경
제주도에 여행을 하러 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별 기대 없이 제주행 비행기를 타긴 했지만, 도착 후 제주의 풍경을 보자마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섰는데, 외국의 농인들과 한국의 농인들 다수가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나와 같이 버스를 탔던 한국분들 중에는 시청각장애인 분들이 많았는데, 관련 단체 혹은 조직에서 함께 오신 모양이었다.
대회가 열리는 제주컨벤션센터에 도착하니, 마치 새로운 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양한 인종의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수어 혹은 국제 수어를 사용하여 대화를 하고 있었고, 거기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으로 여겨졌다. 즉, 내가 입으로 말하거나 스스로 청인임을 밝히지 않는 이상, 내 수어가 미숙하다는 것이 드러나지 않는 이상 아무도 내가 청인이라고 지레짐작하지 않았고, 그것은 이곳이 농인이 다수인 세상, 수어 사용이 기본인 세상이라는 뜻이었다. 나의 농인 수어 선생님 중 한 분의 수어 표현을 인용하자면, 그곳에서는 수어를 아직 농인만큼 구사하지 못하는 내가 바로 '장애인'이었다.
대회에서 본 가장 인상적이었던 풍경 중 하나는, 강연에서 릴레이 통역이 진행되는 모습이었다. 강연자가 사용하는 언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릴레이 통역에 필요한 통역사들의 수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강연자가 외국인 농인인 경우, 그리고 최종적인 한국 수어가 농인 통역사에 의해 전달되는 경우만을 대표적으로 설명하겠다. 참고로, 강연이 펼쳐지는 3개의 공간 중 한 곳에서만 농통역사가 최종적으로 통역을 진행하고, 나머지 두 곳에서는 한국인 청인 통역사가 한국어 음성을 듣고 한국수어로 최종적으로 통역을 진행했다. (아래 그림과 설명은 '탐라홀'에서 진행된 릴레이 통역을 필자의 기억에 의존하여 도식화한 것으로, 오류가 있다면 알려주기 바란다.)
a. 외국인 강연자가 국제수어 사용(A) -> 무대 바로 앞에서 무대를 바라보며 국제수어를 영어로 음성 통역(D) -> 객석 뒤편 부스에서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H) -> 이어폰으로 전달되는 한국어 음성을 듣고, 무대 바로 앞에서 무대 왼편 농통역사를 바라보며 한국어 음성을 한국 수어로 통역(E) -> 한국인 농통역사가 무대 왼편에서 객석을 바라보며 한국 수어로 최종 통역(B)
b. 외국인 강연자가 자국 수어를 사용(A) -> 무대 바로 앞에서 무대를 바라보며 강연자의 자국 수어를 국제 수어로 통역(G) -> 통역된 국제수어를 보면서, 무대 오른편에서 국제 수어 농통역사가 객석을 바라보며 국제 수어(C) + 옆에서 국제 수어를 영어로 음성 통역(D) -> 객석 뒤편 부스에서 영어를 한국어로 통역(H) -> 무대 바로 앞에서 무대 왼편 농통역사를 바라보며 한국어 음성을 한국 수어로 통역(B) -> 농통역사가 객석을 바라보며 한국 수어로 최종 통역(B)
강연자가 음성 언어를 사용할 때, 강연자가 한국인이고 한국수어를 사용할 때 등의 릴레이 통역 절차에 대해서는 유심히 관찰하지 않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릴레이 통역에는 위와 같은 과정을 기본으로 서로 다른 다양한 언어들이 동시적으로 말을 주고받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최소 3개 이상의 언어들의 거대한 상호 교환, 상호 번역이 진행된다는 것을 인지하니 인간의 소통 욕구에서 비롯되는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생명력이란, 소통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100퍼센트의 통번역이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애초에 같은 언어로 대화를 할 때조차 100퍼센트의 전달이 불가능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일 지도 모른다. 소통 가능성이란 어쩌면 언어의 불가능성에 힘입어 그 생명력을 발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100퍼센트의 언어, 100퍼센트의 말이란 불가능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혹은 그 덕분에 우리는 대화를 하려는 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소통은 어쩌면, 안 되니까 더 해보려는 것이다. 릴레이 통역이라는 고군분투의 현장은 마치 언어에 대한 인류의 투쟁의 한 단면과도 같았다.
1. 교차성, 페미니즘, 시청각장애
여러 강연들의 키워드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교차성'이었다. 이번 세계농아인대회 홈페이지에서는 교차성을 "신분, 인종, 성별, 장애 등의 차별 유형들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결합하여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꼭 '교차성'을 주제로 한 강연이 아니더라도, 이번 강연자들 중에는 청각장애인이자 동시에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과 혐오(장애인차별+여성혐오), 청각장애인이자 동시에 흑인 또는 아시아계로서 겪는 차별과 혐오(장애인차별+인종차별), 청각장애인이자 동시에 이주민으로서 겪는 차별(장애인차별+외국인혐오), 청각장애인이자 동시에 여성 무슬림으로서 겪는 차별과 혐오(장애인차별+여성혐오+무슬림혐오), 청각장애인이자 동시에 성소수자로서 겪는 차별과 혐오(장애인차별+성소수자혐오) 등 다양하고 복잡한 저마다의 경험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강연자들이 많았다. 이러한 교차성들은 당사자에게 이중, 삼중의 차별과 혐오의 어려움을 겪게 하는가 하면, 동시에 어느 집단 혹은 어느 정체성에서도 속하지 못하는 정체성 혼란의 어려움을 겪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어려움들을 단순히 토로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차별 유형들이 겹치면 겹칠수록 당사자 농인은 더욱 어려운 상황 속에 있는 것일 테지만, 저마다 다른 교차성을 가진 다양한 강연자들은 교차성으로부터 비롯된 어려움을 그러한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 더 강한 힘으로 이해하고 인식하여 더 큰 용기를 내는 모습을 보여줬다. 교차성은 어쩌면 더 촘촘하고 끈끈한 정체성인지도 모르며, 그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온전히 살 수 있는 사회는 보다 안전한 사회일 것이다. 즉, 우리는 그러한 존재들에게 어떤 형태의 사회를 빚지고 있다.
한국의 지혜원 강연자는 유일하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강연 제목에 포함시켜서 직접적으로 페미니즘을 언급하면서 현재 한국 농인 페미니즘 운동의 경험을 설명하였다('농인의 페미니즘 운동 경험과 인식'). 표본이 많은 연구는 아니었지만 애초에 표본의 수나 질에 의존하는 성격의 연구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신에 농인 당사자들의 내밀한 경험에 집중하며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 및 주도할 때의 환경이 농인들에게 어떤 면에서 불리한지 등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페미니즘 운동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운동에 농인들이 참여하고 주도할 수 있는 조건들에 무엇이 있을지, 또 어디에서 운동의 활성화의 가능성을 발견해 나갈 수 있을지 등에 대한 방향으로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는 가치를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내용이었다. 즉, 농인들에게 필요한 접근성 중에는 의료, 교통, 사법 등에 대한 접근성 외에도 정치 참여, 사회 참여에 대한 접근성 또한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연구자들이 주목한 농 인권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의 공통점이 인상적이었는데, 그것은 농 인권 운동에는 청인의 참여가 일부분 반드시 필요한 것처럼 페미니즘 운동에서도 남성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이 페미니즘이 여성의 문제만이 아니라 남성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근거라는 점, 즉 장애인 인권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처럼 당사자주의가 강조되는 운동에서도 참여자들의 다양성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농사회 구성원들 중에는 시청각장애인들 또한 있음을 잊을 수 없게끔 만든 강연도 있었는데, 바로 한국의 이태경 강연자의 강연이었다. 시청각장애인으로서의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역사를 설명하면서, 자신이 세상과 어떻게 접촉하고 또 소통하는지, 그리고 그런 방법들이 갖춰진 계기들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그의 강연은, 사람과 사람의 소통의 여러 가지 모습들 중 누구보다도 더 가까이 밀접하게 맞닿아서 소통하는 사람들은 바로 시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다. 그의 강연 내내 울려 퍼진 '발구르기 박수'의 울림은 단연 이번 세계농아인대회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
2. 수어 연구, 수어 통역의 문제
이렇듯 다른 어떤 유형의 장애보다도 농인과 농사회에 있어서의 특수함은 소통이라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만의 소통의 방식이 있다는 것, 즉 수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수어 연구는 농사회와 농문화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탐구 영역인 것 같다. 다양한 수어 연구가 있었겠지만 내가 본 강연들 위주로 인상적이었던 지점들을 말해보겠다.
먼저, 벨기에의 어넬리스 쿠스터스의 강연에서 나온, 번역된 한국어로는 '교정'이라는 단어로 설명되는 개념이 있었는데, 서로 다른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끼리 각자의 수어로부터 출발하여 제3의 수어는 물론 제스처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조금씩 서로가 하려는 말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한국 수어를 사용하는 한국 사람과 체코 수어를 사용하는 체코 사람이 대화를 하는데 한국 사람이 체코 수어에서의 '체코'라는 단어를 모른다면 체코 수어 사용자가 '체코'라는 수어를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 한국 수어 사용자는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체코 옆에 있는 나라인 독일에 대한 국제 수어 단어 '독일'을 한국 수어 사용자와 체코 수어 사용자가 모두 알고 있다면, 체코 수어 사용자는 국제 수어 단어 '독일'을 수어로 나타낸 후, 제스처로 그 독일 옆에 있는 나라를 시각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 수어 사용자는 체코 수어 사용자가 처음에 나타낸 '체코'라는 수어가 독일 옆에 있는 나라인 체코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의 특성 중 하나인 자의성은 어떻게 보면 어느 한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의 폐쇄성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폐쇄성이 극복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왜냐하면 어느 한 언어와 다른 한 언어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옆에 있기 때문에, 즉 건너갈 수도 있고 건너 건너갈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비슷한 맥락의 다른 강연에서 한국의 변강석 교수는 cross-sign, 교차사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 방법론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차사인이 발생할 때에는, 시각적 기호화, 언어적 배경, 문해력, 제스처, 메타언어 인지 등 다양한 요소들이 총동원되는데, 그만큼 교차사인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세세하게 신경 쓰며 소통하게 되는 과정이고, 다양한 의사소통 전략과 방법이 풍부하게 뒤섞이는 과정이 된다.
이러한 연구들은 서로 사용하는 언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언제나 소통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현재 내가 개인적으로 구상하고 있는 영화의 주요 장면에 도움이 많이 될 법한 연구들이어서 더욱 관심 있게 보았다. 즉, 언어적 문화적 차이와 그로 인한 한계, 실패는 오히려 더욱 풍부한 언어와 문화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인공지능, AI의 시대인 만큼, 수어와 관련된 인공지능 연구들에 관한 강연과 전시들도 많이 있었다. 전시 부스에서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수어 통역 서비스 관련 회사들이 여럿 있었는데, 나는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것들 대부분은 아바타 캐릭터를 이용한 수어 서비스로 보였는데, 아마도 당장은 가게나 공공기관 등의 키오스크에서의 극히 기본적인 안내 서비스 등 정도가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그 회사들의 궁극적 목표는 완벽한 통역 서비스가 가능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일 텐데, 솔직히 수어를 배우는 입장에서 나는 그것이 가능한 목표인지는 모르겠다. 아래에 '수어 통역의 문제'에 대한 강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또 말하겠지만, 인간이 하든 기계가 하든 궁극적으로 완벽한 수어통역이 가능할지 의문이고, 어느 정도의 결함과 실수 등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의 감안과 인간과 인공지능, 즉 기계 혹은 컴퓨터의 사이에서의 감안이 비슷한 성격일 수 있느냐는 의문이 있다. 그러니까 통번역에 있어서, 특히 수어 통번역에 있어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나는 회외적인 입장인데, 아마도 그 가능 여부는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친숙하고 매력적이게 되는지 여부 혹은 인간이 인공지능보다도 더 위험하고 불편한 존재로 격하되는지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즉, AI의 통번역사 대체 가능 여부는 단순한 통번역의 질의 문제를 넘어서서 현재 인간에게 요구되는 수어 통역사의 역할과 의무 등을 AI가 정말로 잘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는지, 혹은 그것들을 너무나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수행하는 인간 통역사들이 많아져서 농인들의 인간 통역사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바닥을 치는지 여부에 달려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한편, 한국의 연구진(강연자 허인영)은 재난문자와 같이 자동적으로, 동시적으로 정확한 번역이 필요한 부분에 대한 인공지능 통번역 서비스 연구를 내용으로 강연을 했다. 수어 재난문자는 그야말로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한국어 재난문자와 동시적으로 가능해야만 그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 수어통역사를 섭외해서 촬영을 한 후 그것을 다시 영상 파일화 해서 문자로 전송하는 데 걸리는 물리적 시간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인공지능이 단숨에 동시적으로 재난 정보를 수어로 생성하여 전 국민에게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은 실로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즉, 위의 나의 AI의 수어 통번역에 대한 회의는 이렇게 인간이 물리적으로 할 수 없는 영역 앞에서는 누그러질 수밖에 없다. 이렇듯 인간이 가지 못하는 곳에 기계를 보내고, 인간이 할 수 없는 수학적 계산을 컴퓨터가 대신하듯이, 인공지능 수어 통번역 서비스 또한 인간이 하지 못하는 영역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합리적이며, 인공지능은 인간을 대체해버릴 순 있어도 인간의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점, 그저 인간이 맡은 혹은 맡을 역할의 수행 범위와 능력에 대해서 도움을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수어 연구와 관련하여 얘기하고 싶은 마지막 내용은, '수어 통역의 이면'이다. 벨기에의 마르테 드 뮐더가 발표한 이 강연은 이번 대회에서 내가 본 가장 비범한 강연 중 하나였는데, 그 내용이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겠지만 반드시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드는 강연이었다. 강연의 요지를 간단히 말하자면, 농인과 농사회가 (청인 통역사 중심의) 수어통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말해질 수 있는데, 먼저 통역사의 존재가 농인의 언어적 종속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농인이 통역사를 통해서만 정보를 취득하거나 어떤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통역사의 수 혹은 질에 따라서 농인이 받을 서비스의 양질이 결정되기 때문에 청인 통역사에게만 의존할수록 농인의 삶은 더욱 불안정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소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 또는 집단에게는 피할 수 없는 문제로 보이지만, 그 문제의 원인이 수어라는 언어의 소수성에 있다기보다는 한정된 수의 통역사의 존재에 대한 무조건적 의존성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통역사가 없다면 그러한 소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네트워크와 정보에 대한 접근성 끊기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고등 교육 및 전문화 과정에 있어서의 수어 통역사 양성이 청인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수어 통역의 질과 포커스가 농인 학생들을 위해 맞춰져있지 않아 수어를 통한 고등 교육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즉 (청인에 의한) 수어 통역이 결국에는 농인에게 또 다른 장애가 되어 결국 전문성을 갖춘 농인들을 양성하지 못하고 그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문제는 수어 통역이라는 것만 있으면 그것의 성격과 질이 어떻든 농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청인들의 무지와 착각에서 기인할 것이며 청인들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농교육 환경 조성에서 농인 당사자의 참여를 배제함으로써 발생하는 것일 테다. 즉, 수어 통역이 있다는 것만으로 농인이 겪는 모든 차별과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하며 그 외의 고려와 고민을 하지 않는 동시에, 그 수어 통역을 담당할 수어 통역사 양성에 있어서도 농인을 배제하며 청인 중심으로 중요한 사항들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강연자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국가 및 사회, 교육 기관 등에서의 공공 수어 통역, 전문 영역 통역 등이 오히려 교육 및 서비스 전문가와 농인 당사자들 간의 직접 소통을 저해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즉, 수어 통역이 제공되기 때문에 농인들과 정보 전달자 간의 직접 소통이 불필요하게 여겨지거나 아예 차단될 수 있고, 그로 인해 농인에게 오히려 추가적이고 직접적인 소통의 기회가 박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첫째로, 수어 통역 자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보다 냉정하고 비판적인 관점이 필요해 보이고, 둘째로, 수어 통역의 질에 대한 의심과 경계 및 그 보완에 대한 노력이 끝없이 필요해 보이며, 셋째로, 농인을 위해서는 단순한 수어 통역 배치 외에도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항시적 인지가 필요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강연이었다. 강연자가 제기한 이러한 질문들은 수어 통역에 대한 비판적인 관점을 촉구하며, 무분별한 수어 통역 만능주의를 경계하고 결국에는 농인들의 사회 참여와 전문성 강화를 모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수어 통역은 어떤 면에서 사실상 완벽하게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무슨 말이냐면, 수어 통역은 공상과학 영화에서 어떤 물을 마시면 외계인들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것과 같은 그런 마법 같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어 통역에는 한계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고, 수어 통역을 활용하는 데 있어서는 언제나 그러한 한계들을 감수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 충분한 환경을 마련한 후 활용해야만 하는 것이다.
3. 보고 싶었던 주제들; 농교육, 농예술, 농 이미지
마지막으로, 잘 모르는 분야라서 혹은 더 알고 싶은 분야라서 보고 싶었지만, 볼 수 없었던 주제들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다. 그중 첫 번째는 한국의 농교육 실태에 대한 조사 혹은 연구였다. 한국의 농교육에 대한 문제는 한국 농사회에서 많이 얘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이고 정량적인 조사 또는 연구, 혹은 당사자들의 증언 등은 충분히 수집되어 있지 않거나 찾아보기 쉽지 않아 보인다. 이번 WFD에서 이러한 내용에 대한 조금 더 구체적인 사례들을 알 수 있기를 바랐지만 아쉽게도 볼 수가 없었다. 대신 일본에서 온 메이세이학교 교장의 강연을 볼 수 있었는데, 일본에서 제대로 된 농교육을 실현하는 농학교를 세우기까지의 과정과 현재의 성과들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수어를 제1언어로 하는 이중언어, 이중문화를 기반으로 한 사립 농학교인 메이세이 학교는 모든 활동을 일본수어로 진행하는 것의 중요성을 증명해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여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한편 한국농아인협회 사무총장은 자신의 강연에서 수어중고등학교 추진에 대해 짧게 언급했는데, 당장 실현되기는 어렵겠지만 앞으로 기대를 갖게 되는 대목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현재 농 학생들의 교육 실태에 대한 다각적이고 정량적인 자료들이 필요할 것이고, 다양한 과목과 학습 분야에 대한 시도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훗날 농인들을 대상으로 한 예술 교육에 대해 나름의 시도를 해보고 싶은 입장으로서, 한국의 농교육 연구에 대한 부족은 나에게도 꽤나 무거운 숙제로 느껴지기도 했다.
보지 못해 아쉬웠던 두 번째 주제는, 한국의 농예술에 대한 소개 혹은 연구였다. 개인적으로 농인들의 예술 활동에 대한 가능성은 많이 느끼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현재 농인들의 예술 창작에 대한 접근성 혹은 농예술의 예술성에 대한 평가, 그리고 무엇보다 다양한 예술적 시도들이 보이는 상황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혹시나 한국 또는 해외의 농예술에 대한 강연을 볼 수 있을까 기대를 했지만 농예술을 집중적으로 다뤘던 강연은 없는 것으로 보여 아쉬웠다. 대신 포스터 부스에서 일본 농예술을 지원하는 어느 재단의 사업으로 보이는 'Training of Deaf Artists Project'에 대해 알 수 있었는데, 순수예술을 포함하여 영화, 연극, 연기 등 꽤나 다양한 분야에 대해 농인들에 대한 예술 교육과 활동을 지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바로 그러한 동시적 다양성에 대한 투자와 시도가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부럽기도 했다.
내가 농예술을 정의할 입장은 아니고, 또 그것이 정의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느끼는 농인들의 예술 활동에 대한 가능성의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언급할 수 있겠다. 먼저, 음성언어와는 체계가 다른 시각언어인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예술 활동에는 역시나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농인들이 반드시 모든 예술 활동을 수어 기반으로, 수어를 사용해서만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농인들은 때에 따라 자신들의 예술에 수어 혹은 수어 기반을 과감히 제외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예술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다른 방법으로 말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농인들이 예술 활동을 하게 된다는 것은 수어 외의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언어에 대한 개념은 청인과 농인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농인은 예술을 청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바로 그 '다른 방식'이라는 것이 예술성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기에 농인들의 예술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즉, 농예술은 청인들의 예술을 흉내 내거나 단순히 수어로 번역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며, 자신들만의 언어로, 혹은 자신들만의 비언어로 자신들의 모국어인 수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그 무엇에 대해 창작을 해나가며 '예술'이라는 것의 개념을 허물며 다양한 한계를 발견해 나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농 이미지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 내가 말하는 '농 이미지'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농인들 혹은 농인들과 관련된 것이 바로 지금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면, 드라마 혹은 영화에서 청인들에 의해 연기되는 엉터리 수어를 비롯한 엉터리 농인 캐릭터, 혹은 농인 당사자 배우에 의해 연기되었지만 청인의 논리 틀에서 제한적으로만 소비되는 농인 캐릭터 등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TV 뉴스 오른쪽 하단에 등장하는 청인 수어통역사로만 대변되는, 농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사실상의 대체 이미지, 그 이미지를 촬영하는 정면샷이라는 하나의 획일화된 앵글에 대한 연구, 또는 농인들이 직접 만드는 농아방송에서의 앵글과 내용, 소재, 쓰임 등에 대한 분류 등 매체에서 표현되는 농인들의 이미지에 대한 가능한 연구는 무궁무진할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청인, 특히 수어를 전혀 모르는 청인들의 입장에서 농 이미지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거나, 매우 제한된 종류의 이미지로만 또는 왜곡된 이미지로만 남아 있을 것이다. 따라서 농 이미지에 대한 연구의 중요성은 앞으로 계속해서 커지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이번 WFD에서 내가 본 강연자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개성과 매력, 다양하고 섬세한 가치관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들을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으로 가져가면서도, 자신 밖의 사람들에게 또한 관심을 기울이며 발화하고자 하는 농인들의 각양각색의 모습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결국에는 농 이미지는 농인 자신들이 만드는 것일 테다. 농인의 권리 또한 누구보다 농인의 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농인은 농인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세상의 여러 다양한 문제들을 위해 발화하고 행동하고 바꿔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농사회에 산적한 여러 문제들에 우선순위를 매기는 것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다. 각자가 각자의 고민을 갖고 그것을 고민해 나가는 것이 중요할 뿐일 것이다. 이번에 제주도에서 본 전 세계의 농인들은 그것을 모두 확신하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 풍경에는 개개인 자신만의 확신도 있었겠지만,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힘입어 가능했던 확신도 있었을 것이다. 농인이 할 수 있는 상상에도, 농인에 대한 상상에도 한계는 다양한 각도로 무한히, 뒤로 밀려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