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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형식 Sep 15. 2023

다섯 번째 #4

"상상을 통한 짐작으로 나는 확신할 수 있을까?"

 연기를 하는 사람인 유림은 시나리오를 하나 받았다. 하지만 그 시나리오를 건넨 감독은 그것이 온전히 완성된 시나리오가 아닌 실패한 시나리오라고 했다. 그런데도 그러한 실패한 시나리오를 읽어보자고 했다. 시나리오의 전체를 유림 혼자서 읽어보자고 했다. 그러니까 유림은 시나리오 속에 등장하는 모든 역할을 혼자 도맡아야 했다. 거기에는 배우 자신과 비슷하기도 하고 전혀 다르기도 한 인물들이 다양하게 여럿 있었지만 당연히 배우 그 자신은 없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배우는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야만 연기할 수 있다. 혹은 연기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그 연기되는 역할이 배우 자신이 아닌 것만은 또 아닐 것이다. 연기되기 전의 역할과 배우를 분리한다는 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연기하는 배우와 연기되는 역할을 분리하여 본다는 건 착오이거나 자기기만이다. 하지만 배우는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착오와 자기기만을 각오해야 하고 또 감내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배우가 연기를 마친 후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배우에게 그저 문법적인 구분일 뿐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문법은 배우와 역할을 구분하는 데에 기능하지 않고 배우 자신이 어느 고정된 정체성이나 역할 혹은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할 때이든 하지 않을 때이든 언제나 자신 앞에 있는 지문과 대사를 수행하며 변화하고 이동하는 과정에 있음을 이해하는 데에 기능하는 것이다. 언어에 빗대자면, 배우 자신은 이 단어이거나 저 단어로서 위치하거나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 단어에서 저 단어로의 흐름과 역흐름의 동시적 시선이다. 배우에게 자신과 역할을 구분하기 위한 통사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느 방향을 자기 자신으로 바라봐야 할지를 고민하고 찾기 위한 방위표일 뿐이다. 자기 자신과 바깥세상, 무대 안과 무대 밖. 연기란 궁극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연기가 시작되자 시나리오는 더 이상 믿을 게 못 됐다. 시나리오와 배우를 각각 화면 좌우에 배치하여 동시에 보여주며 비교하지 않는 이상 배우의 연기가 얼마나 시나리오를 따른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게 됐다. 배우의 연기는 시나리오를 폐기한다. 유림은 한 번에 한 인물의 대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 씬에 인물이 다섯 명이라면, 유림은 최소 다섯 번의 서로 다른 연기를 해야만 했다. 연기를 마치고서도 카메라 녹화 버튼은 꺼지지 않았고 방금 한 연기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는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들이 실패한 시나리오에 있던 대사였는지 아니면 연기가 종료된 후의 유림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 것인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는 유림의 미묘한 시선 변화와 표정 변화 그리고 이야기의 맥락과 분위기를 살펴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시나리오를 동시에 보지 않는 이상 그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확신하기란 불가능하다. 알아차렸다고 생각할 뿐이지 진정 알 수는 없다. 그런데 그 모든 걸 차치하더라도, 연기가 종료되기 전이나 후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배우 자신만이 알 수 있다. 배우를 제외한 우리는 이미지들을 다만 연속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 컷 다음엔 그다음 컷이다.


 유림은 온전하지 못한 시나리오에 대한 연기를 온전히 완성할 기회를 받지 못했다. 유림의 연기는 애초에 실패를 향해가는 연기로, 말하자면 운명 지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에게 실패한 시나리오를 건네는 일 따위가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1인 다역 또한 바로 그러한 의미였다. 혼자서 모든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 리가 없었고, 무엇보다 그것은 애초에 논리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일, 의미가 발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림에게 부여된 연기 임무는 불가능하고 부조리한 연기였다. 바꿔 말하자면 유림이 하는 연기는 실패한 시나리오 속 가능성들의 잔해들을 배우의 몸과 동작과 말로 소진하는 연기였다. 허물어지는 연기. 하지만 그러한 연기 안에서도 말의 주고받음을 목격할 수는 없을까? 혹은 말의 주고받음이라는 것의 끝없음을, 우리 눈앞의 팽배함을, 어떤 형태로든지 말의 주고받음이, 이미지의 끝없음이 펼쳐지고 있음을 그러한 허물어지는 연기 속에서 발견할 수는 없을까?


 단순히 1인 다역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유림은 프레임 안의 사실상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로 인해 유림'들'은 하나의 컷의 프레임 안에 동시에 함께 모습을 드러낼 순 없었다. 그들은 각자 개별적으로 다른 시간과 위치의 컷을 부여받아야 했다. 콘티뉴이티는 물론 파괴되거나 무시되었고, 같은 배우가 다른 모습으로 서로 대화를 하는 척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하지만 모든 연기는 어쨌든 '척하는' 것이 아닌가?). 앵글을 넓게 잡아 프레임 안에 시나리오 속 인물 두 명을 담고자 할 때에는, 한 명의 인물이 모습을 드러낼 때에는 다른 인물이 모습을 감추어야만 했다. 그렇게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몽타주들은 어쩌면 말한다는 것의 불가능성을, 영화의 불가능성을, 연기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배우는 계속해서 존재하고 (비)연기는 계속된다. 삶의 지속, 이미지의 지속 앞에서 그러한 질문과 의문들은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러한 삶과 이미지의 지속이 그러한 질문과 의문들까지 지고 가고 있다는 말이다.


 영화는 프레임 밖을 볼 수 없다. 영화는 언제나 프레임 안을 비출 뿐이다. 무의미할 정도로 당연한 말이다. 배우는 어떠한가? 배우는 언제나 프레임 밖을 내다보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영화의 관객으로서, 그리고 세상의 관객으로서 우리의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볼 수 있다거나, 혹은 우리의 프레임 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우리의 프레임 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을 순 없다고 정말로 말할 수 있는가? 한편, 배우 또한 영화의 프레임 밖을 내다보는 자신의 프레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쟁점은 영화의 프레임 밖을 배우가 보상하고 책임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배우와 관객이 각자의 프레임을, 그리고 상대의 프레임을 서로가 얼마나 상상할 수 있느냐이다. 즉 그것은 프레임 안팎을 나누는 경계를 통해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구분이 가능하다는 믿음에 대한 근본적 회의다. 우리는 프레임 밖뿐만 아니라 프레임 안에 대해서도 상상해야만 한다. 우리는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말하면 안 된다. 우리는 무언가가 보이는 것만 같다고만 말할 수 있다.


 유림이 만나는 프레임 밖의 인물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익명의 인물들로서, 특정되지 않는 인물들이다. 왜 그럴까? 그들이 프레임 안에 담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볼 수가 없어서? 그렇다면 프레임 안에 담긴 유림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그 유림들을 구분하고 특정할 수 있는가? 아니면 우리는 그 모든 유림들을 그저 한 명의 유림으로 봐야 맞는 것일까? 그렇다면 유림은 누구인가? 그것보다, 다시, 익명의 존재들이라는 것은 누구인 것인가? 그들은 존재하지 않거나 검증되지 않은 자들인가? 혹은 비현실적이거나 미未현실적이라는 말인가? 그렇다면 프레임의 경계는 우리의 확증에 대한 욕구를 안달 나게 하는 경계선인가? 프레임 안에 있으면 안심이 되고 밖에 있어 보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것인가? 


 다시, 유림은 누구인가? 유림은 이 실패하는 영화, 실패를 위한, 실패하기 위한 영화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유림의 실패하면서 허물어지는 연기가, 그리고 그러한 허물어짐에 의해 유림과 영화가 미끄러져 내려오는 곳이 또다시 유림의 무대, 이 영화가 되었다. 유림은 자신이 상상하기 어려운 시나리오 속 인물인 소영의 사진 활동을 직접 해보고, 그렇게 역시나 유림 스스로 실패했다고 생각할 그 장소들 속으로, 유림 자신의 고민과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인 유영으로서 들어가 유영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고민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끝까지 유림은 무엇을, 누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망설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유림이 이 영화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확신이, 어떤 확신의 연기가 가능해야만 했던 것일까? 유림의 눈에, 유림의 프레임으로 분명히 봤고 말을 주고 받았던 영화 프레임 밖의 인물들을 유림은 어떻게 상상하고 확신하며 연기해 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확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만 같은데 말이다. 실패하는 영화, 실패하기 위한 영화, 실패하는 연기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유림은 그저 끝까지 소진되고 고갈되어야만 했다. 이 이미지 다음의 그다음 이미지가 도저히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을 때까지? 불가능한 마주봄의 불가능함에 이르고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때까지? 아니, 연기와 영화가 여기서 끝나도 그다음 이미지가 가능할 것으로 믿을 수 있을 때까지. 유림은 "침묵에 도착하기", "말하지 않고 걸어 나가기"를 말한다. 그다음은 익명의 존재가 걸어 나가는 그림이다. 유림이 이 영화를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영화 속 인과적 연관성이 마련될 때보다는, 유림이 이 영화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의 의미가 최소 한 가지 이상, 가능하면 여러 가지로 생겨날 때에 가능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어떤 연기가 가능하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연기가 어떤 의미일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유림은 결과적으로 프레임 밖 익명의 인물들의 비가시성을 시나리오 안에 자신의 몸의 부재를 통해 도입하는 연기를 했다. 그리고 영화는 처음으로 되돌아가며 유림이 사라진 그 자리에 당신은 어떤 인물들을 상상할지를 관객에게 묻는다. 실패한 시나리오가 유림에게 주어졌듯, 실패하는 영화, 실패한 영화가 이제 관객에게 주어진다. 이제 우리는 유림이라는 인물이 상상하기 힘든 인물, 확신하기 힘든 인물이었음을 뒤늦게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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