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7

확신하지 않는 믿음

by 채형식


배우의 확신하지 않는 믿음은 필경 시간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불신이라기보다는 믿음의 자기 불신이다. 그것은 하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망설이는 액션이다. 그러한 액션은 모호해 보이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엔 그것도 하나의 시지각적 이미지일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는 어떻게 존재한단 말인가. 배우는 자신이 그저 실패한 이미지일 뿐일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배우냐 배역이냐, 사람이냐 이미지냐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배우는 관객이 이미지로서의 자신을 단번에 알아차리거나 해석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배우 자신의 개인적인 단념 혹은 만족에 의해서가 아니라 배우가 연기하는 그 순간, 그러니까 보임으로써 존재하는 그 순간만큼은 배우가 자신을 그 어떤 것과도 몽타주하지 않은 채 모습을 내보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그저 독립된 한 장의 사진과도 같은 정지들이 되면서 연기로 보이게 되는 것 같다. 연기도 영화처럼 한 장 한 장의 사진과도 같은 정지들로 움직임을, 존재를, 시간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확신하지 않는 믿음은 나의 현재와 나의 지나간 시간 혹은 다가올 시간이 서로 연결성이 없다는 믿음이다. 그러니 그것은 어떤 종류의 시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시간이란 본디 그런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전과 이후의 어느 지점이 지금의 어느 지점과 일치하는 것을 신화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시간은 연대기적일 필요가 없다. 시간이 그렇게 어느 방향성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면 배우는 무엇도 확신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과거도 미래도 현재도. 하지만 확신하지 않는 믿음은 그러한 확신할 필요 없음 또한 확신하지 않아야 하고, 그렇지만 여전히 어떤 믿음의 시간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흐르는 시간도 아니고, 완전한 부동의 시간도 아니고, 시간의 판도 아니고, 그저 지연되는 시간이다. 얼어 있는 호수가 녹는 것을 그저 자꾸만 미루는 속절없는 추위를, 여름에 이야기하는 시간이다. 확신하지 않는 믿음은 앞의 샷과 뒤의 샷, 이 샷과 저 샷의 몽타주를 지연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시간은 지연되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선뜻 이 샷과 저 샷을 몽타주하는 것을 망설이게 하는 믿음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샷들은 이어질지라도 말이다. 바로 그러는 와중에 조차 샷들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속도에 저항하거나 반항하고자 아무것도 없는 샷과 샷 사이에서 버티려는 힘이다.


그럼에도 그것 또한 하나의 몽타주이다. 몽타주는 연속적이고 또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확신하지 않는 믿음은 선택하고 배제함으로써 계획되고 조립되고 발전하고 완결되는 서사와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몽타주의 어떤 특정한 효과, 목표, 해석에 무관심한 몽타주이다.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말해지지 않는 믿음, 언어화되지 않는 믿음이다. 결국 우리는 배우가 정확히 어떤 마음과 어떤 믿음을 갖고 이 영화에서 연기했는지, 그러니까 카메라 앞에서의 연기는 물론, 본인의 시나리오북 여백에 글쓰기, 인스타그램 게시글 작성, 그리고 프레임 안에서 자신이 사라진 장면을 받아들이는 것까지, 그 모든 연기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어쩌면 배우는 자신이 영화 속에서 본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아니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배우로부터 어떤 믿음도 갈취할 수 없다. 배우의 피상적인 연기, 이미지 뒤의 어떤 것도 그저 가늠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배우의 모습은, 그리고 그러한 모습을 연출하는 이 영화의 부조리한 몽타주들은, 그저 자신의 종료를 지연시키고자 하려는 것만 같은 영화는, 우리에게 확신하지 않는 믿음을 일종의 지문으로 준다.

마치 모든 일에는 믿음이 필요하다, 라고 말하듯 배우는 갖가지 믿음들을 나열한다. 연기가 절대적이거나 신화적인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숨을 쉬고 있기 위해서도, '나'를 중심으로부터 잃지 않기 위해서도, 확신하지 않기 위해서도, 영원하지 않기 위해서도, 살아있기 위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에 있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확신하지 않는 것에 있어서도. 멈춰있지 않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위해서도, 잘 해내지 않기 위해서도, 존재하기 위해서도. 한 장 한 장의 이미지에 믿음이 있다면, 배우의 연기의 동작 하나하나, 정지 하나하나에도 믿음이 있을 것이다. 카메라가 담지 못한 인물들, 이야기들에도 그렇다고 영화는 말하고 싶어 한다. 이 영화의 역부족, 이 영화의 한계 탓에 담지 못한 그 존재들에 대한 믿음은 결국 변명이나 미사여구에 불과하겠지만. 그러한 비판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시간을 위해 배우는 그만큼 소진되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나하나의 믿음들이 몽타주되면 우리가 뭔가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지 말라면서, 영화는 이어지고 또 시간을 미루고, 배우는 아예 자신이 포착한 정지 속으로 들어가기까지 한다. 확신하지 않는 믿음은 시간도 죽는다고 말하는 믿음이다. 시간도 죽는다는 것. 시간의 죽음에 대한 믿음. 시간에 있는 죽음. 시간들의 죽음. 관객은 이제 속절없이 그러한 지문들에 대한 자기만의 연기를 하고 동시에 자기만의 몽타주, 자기만의 영화를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배우는 자신이 소망한 대로 이 영화를 벗어나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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