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8

가만히 있는 것. 멈추지 않지만 정지해 있는 것.

by 채형식


영화는 영화 속 인물이 SNS에 기록한 사진들을 보여주고, 그 사진 속 침묵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영화는 사진을 꿈꾼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시간이 죽었다고 말한다. 배우는 죽은 시간 속에도 숨이 있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정지들이 연결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정지 옆에 또 다른 정지들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이라고. 보통 명사 시간이 죽은 것이 아니라, 어떤 시간들이 죽는다고. 죽은 시간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죽음들에 대한 인식이라고. 시간이란 그렇게 죽이고 살리는 어떤 대상이 아니고, 그래서 시간을 믿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떤 시간에 대한 믿음 또는 어떤 믿음의 시간이 있을 뿐이라고. 그것은 어느 한 정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끙끙 앓다가 무엇도 말하지 못한 채 늘어지면서 발생하는 시간, 이어지는 다른 정지들을 놓치고 망각해 버리면서 비어지는 시간이다. 영화가 정지들의 연속으로 운동할 때, 배우는 정지해 있고자 하는 힘과 걸음을 옮기고 무언가 행동하고자 하는 힘의 사이에서 망설인다. 배우는 정지와 운동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져야만 자신의 부조리한 연기 행위 속에서 살 수 있다. "가만히 있는 것. 멈추지 않지만 정지해 있는 것." 영화는 그러한 자신의 이미지들을 통해서만 자신을 반성할 수 있다.


가만히 있는 것, 멈추지 않는 것, 정지해 있는 것을 하나의 동일률에 넣고자 하는 배우의 텍스트, 즉 배우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텍스트-이미지 뒤로 실패한 시나리오의 흔적이 비친다. 아무것도 아닌 그것들. 배우에게 그것은 입으로 몸으로 읽어버리면 그만인 것들이다. 공기를 밀어내며 소리를 내고는 사라지는 것들. 몸을 움직여 공기를 가르고는 어차피 되돌아올 동작들. 어쩌면 인간의 생은 모두 그렇게 사라지면서 되돌아오는 덧없는 수행들일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영화가 원하는 것보단 한참 모자란 단계의 우울증일 것이다. 그렇다면 비록 이 영화와 배우가 그러한 수행들보다 나은 것들을 할 수 있진 못하지만 대신 그저 그것들을 그대로 수행할 뿐인 걸까. 자신들이 수행한 것보다 더 나은 가능한 수행들이 있었을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은 그저 무너지고 안으로 접힐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패라 부른다. "가만히 있는 것. 멈추지 않지만 정지해 있는 것."이라고 적힌 배우의 텍스트도 의미를 형성하는 데 실패할 뿐이다. 그것을 적었을 배우의 손동작도, 그것을 바라보는 카메라도, 모두 무용하다. 그래서 카메라는 침묵과 정지의 공간인 사진 속에 들어간 배우가 바라보는 그 무엇을 바라보지 못한다. 영화는 그저 배우의 SNS를 인용했을 뿐이다. 영화는 이 실패하는 배우가 없는 곳은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것은 이 영화 자신의 시선이 언제나 실패의 시선일 뿐이고, 자신의 시선을 제외한 세상은 그렇지 않길 바라기만 할 뿐이라서일까? 아니면 배우를 그저 옥죄이고 싶어서일 뿐일까? 그렇다기보다는 이 배우가 이 영화의 실패한 시나리오를 온전히 떠맡은 존재이고, 자신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자신의 이미지에 비치는 것을 통해서만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데, 그때의 그 자신의 이미지가 배우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신의 삶과 자신 앞의 삶을, 자신의 이야기와 자신에게 온 이야기를, 자신의 시공간과 자신이 믿어야 하는 시공간을, 현재와 과거를 이중화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신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못하는 것을 이중화한다. 자신이 연기하는 것과 연기하지 못하는 것을 이중화한다. 이 영화가 이 한 명의 배우만을 쳐다보는 것은 이 영화가 그저 다른 배우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우는 자신이 연기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것이 바로 연기의 의미인데, 하지만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연기한다는 것은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자신과 자신이지 못 하는 것으로 분열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을 단순히 지나간 것으로의 과거가 아닌 과거와 단순히 도래할 것으로의 미래가 아닌 미래로, 공간을 내가 관측한 공간과 관측하지 못하는 공간으로 분열하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을 믿어지길 바라는 믿음과 믿어지지 못하는 것을 아는 믿음으로 분열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만히 있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과 정지해 있는 것으로 분열하는 것이다. 그리고 배우는 자신의 한계인 그러한 이중성에 대해 그저 침묵한다. 침묵으로서 말하고 또 침묵이라서 말하지 않는다. 이것이 배우가 연기를 통해 자기 자신을 재구성하는 과정들을 사실은 구성하고 있는 정지들의 사태다. 이 영화는 일종의 우울증적 영화, 우울증을 앓는 영화다. 우울증은 낫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한참 뒤에, 너무 늦게 오는 것, 왔지만 아직 온 것이 아닌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다섯 번째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