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9

말하지 않고 걸어나가기

by 채형식

끝없이 허물어지는 영화? 그것보다는 자꾸만 성립되지 않으려는 영화. 말을 하지 않는 방법을 찾으려는 영화라기보다는 말의 대상 주변에서 그저 배회하며 말하기를 끝없이 미루려는 영화. 그것 또한 말하기임을 알면서도.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목적은 무엇인가? 배우는 이 영화의 프레임 안에서 (그리고 아마도 프레임 밖에서도) 사라지고 싶어 하고, 그렇게 된다. 배우는 이 영화 내내 무엇을 했는가? 그는 그저 시나리오를 읽고, 시나리오 속 인물들을 불완전하게 연기하고, 시나리오 속 공간을 걷다가 멈추고 바라보고 또한 연기의 바깥 혹은 연기와 연기 사이에서 말 그대로 말하거나 말을 그쳤다. 또한 시나리오 속 인물들의 시나리오에 쓰이지 않은 모습들을 상상하고 부족하게 재현을 시도했다. 배우가 이 영화의 공간들을 만들어나갔지만 그렇다고 공간을 휘젓거나 지휘하는 대신 배우는 그 공간들에서 배회하거나 그저 서 있을 뿐이다. 배우는 그런 이미지에 소용되고 소멸될 뿐인가? 아마도 배우는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니면 오히려 배우는, 자의에 의해서는 아니더라도, 어쩌면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인물들을 하나씩 소멸시켜 갔다. 시나리오에 부족하게 쓰인 인물들을, 배우는 자신의 불안정한 연기로 하나씩 소멸시킨다. 배우는 인물을 만나기 위해 연기하는가 아니면 인물을 소멸시키기 위해 연기하는가? 인물을 소멸시키기 위해 만나는가 아니면 인물을 만나기 위해 애쓰다가 그러지 못함으로써 소멸시키는가? 배우의 연기는 실패하는 것은 자명한데, 그것은 만남의 실패인가 아니면 소멸의 완수인가? 아니면 소멸 또한 실패할까? 아니면 소멸은 실패를 초월하는가?


배우는 카메라가 담지 못하는 것들을 바라본다. 카메라는 배우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은 물론 배우가 보는 것들을 보거나 담지는 못하고 겨우 추측할 뿐인 정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만을 프레임 안에 담고 있는 카메라지만 카메라는 소멸의 작업을 할 뿐인 배우를 진정 보지 못한다. 카메라는 배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배우에 대해 생각할 뿐이다. 소멸의 작업을 생각할 수 있을 뿐이지 인물들을 소멸시키는 배우를 보지는 못한다. 카메라가 그렇게 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지라고 말한다. 스크린만이 우리의 뇌인 것이 아니라 카메라도 이미 우리의 대가리 속에 있다. 대신 본다는 특권은 이 유일한 배우에게만 주어졌다. 배우는 프레임 바깥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프레임 안의 보이지 않는 인물들에 시선을 두고 대사를 주고받기도 하다가 프레임 바깥의 풍경들을 보거나 아니면 어떤 알 수 없는 생각에 잠기면서 가끔은 아예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뿐이다. 그 행위자가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없을 때에만 본다는 동사를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카메라는 그렇게 보는 배우를 자신이 본다고 생각할 뿐이거나 배우의 시선이 출발한 곳이나 도착한 곳에서 뒤늦게 혹은 미리 본다는 것을 생각할 뿐이다. 카메라는 배우의 시선의 시간의 어느 지점에서 이미지를 그릴뿐이다. 거기에서 그저 렌즈캡을 열고 있을 뿐이다. 사실상 이 영화의 카메라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카메라다. 이 배우는 아무다. 영화에서는 아무만이 볼 수 있고 카메라는 아무가 아니다.


배우는 결국 사라지고, 정말로 카메라는 아무도 보지 않게 된다. 카메라는 역순으로 배우가 있었던 자리를 비춘다. 아무가 없는 자리들을 거쳐 아무가 없는 자리에 도달한다. 하지만 이러한 역순은 그저 지나온 자리들을 되짚어 보는 의미에 불과할까? 아니 차라리 이러한 컷들은 시간이 하나의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 함이다. 게다가 시간이 역순으로도 흐른다거나 하는 것도 아닌, 그저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시간은 그저 고여 있는 것이고, 얼었다가 혹은 녹았다가 할 뿐이라는 것. 어느 특정 시간이 얼면 그 특정 시간은 말 그대로 얼어 있을 뿐이다. 얼었다가 녹거나 녹았다가 언다. 그러면 인물과 카메라가 자리할 수 있는 경로가 바뀔 뿐이다. 영화는 언 시간들의 주변부를 배회하는 운동일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카메라 앞에 배우가 더 이상 없다고 해도 카메라가 우리의 대가리 속에 있다면 우리는 어떤 인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배우의 소멸은 그 자체로 그 어떤 인물이다. 그 인물은 누구이고 그는 온몸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아무가 나의 대가리 속 카메라에 다음 생각을, 다음 이미지를 촉구하는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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