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1

by 채형식


소위 말의 주변에는 침묵이 있다거나 혹은 그 반대를 말하는 것은 이제는 흔한 말이다. 말의 사이사이에도 침묵이 있다거나 침묵의 사이사이에 말이 있을 뿐이라는 문장들도 그렇고 말이다. 모든 이분법적 관계가 그러하듯 결국 말과 침묵은 서로 뗄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역시나 인간의 말하기라는 신비로운 행위를 이해하고자 할 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이란 무엇이고 침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말과 침묵을, 보다 정확히 하기 위해서는, 말이라는 것이 있을 때와 침묵이라는 것이 있을 때라는 것을 구분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말과 침묵이 서로에게 뗄 수 없는 운명적인 이분법적 관계라고 말하고자 한다면, 말은 무엇이고 침묵은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말이라는 것을 일단 그것이 뱉어지기만 하면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그것을 구분하는 일은 어렵지 않은 편이 될 것이다. 소리가 나면 말, 소리가 나지 않으면 침묵. 사태는 많이 달라지긴 하지만, 소리에 국한시키지 않고 좀 더 범위를 넓게 잡아도 마찬가지다. 어떤 움직임이 있다면 말, 움직임이 없다면 침묵. 또한 시점을 3인칭적으로 가져가서, 만약 소리를 내지 않든 움직임조차 없든, 바로 그것에 대해 언급한다면 그 언급은 또 말이 되고, 언급하지 않으면 그 언급하지 않음은 침묵이 된다고 구분할 수도 있겠다. 즉 말은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말할 때 말이 되고 침묵은 말이 없을 때 침묵이 된다는 모양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결국 말과 침묵을 구분하는 것은 일종의 자의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말과 침묵을 구분하는 것의 의미는 없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침묵을 언급한다면, 침묵을 인식한다면, 침묵의 의미를 찾는다면 그 행위는 또 말이 된다. 그러니 침묵에 대해 말을 얹을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마치 그 침묵이라고 일컫는 것이 마치 말이라도 하는 것인 양 우리가 말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하는 순간 거기에는 말이 있을 뿐이고 침묵은 어디론가 또 달아날 뿐이다. 그러니 침묵에 대해서 말하거나 침묵으로 말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는 해도, 침묵이란 것은 언제까지나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기에, 침묵을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침묵은 우리가 적어도 '침묵'이라는 이름은 붙일 수 있는 것으로는 남아 있는데, 만약 침묵이 사실은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침묵을, 그것의 의미를, 그것의 실체를 어떻게 체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음성언어의 대표적 습성인 이름 붙이기와 주석 달기조차 할 수 없이 만약 침묵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도 그럼에도 말과 뗄 수 없는 운명적 관계 속에서 심지어 말과 함께 서로를 추동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말과 침묵을 음미할 수 있으려면, 아니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침묵을 상정하기 위해 그 말할 수 없는 침묵을 빼고 말하자면, 그저 말이라는 것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으려면, 말의 본질에서부터 논의를 재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본질이란 것은 침묵을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느라 말의 범위를 축소하며 생긴 말하기에 대한 우리의 오해와 왜곡, 모순된 태도일 것이고, 침묵과 대비하느라 과장된 말의 권능에 대한 찬양에 가려진 말하기라는 것의 한계와 무능력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침묵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어 하는 것과 말이 서로 뗄 수 없으면서 함께 추동하는 사이인 동시에 그 침묵을 말할 수조차 없는 것임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말의 실체와 본질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는 것이 침묵의 빈자리 또한 해소해 줄 것이다. 자, 침묵을 말할 수 없으니, 이제 우리는 침묵을 말할 필요도 없다.


일단 말은 기본적으로 발화자와 청자를 동시에 상정한다. 청자 없는 말하기란 어디에도 없다. 발화자만큼 청자 없이는 말은 불가능하다. 방 안에 누군가가 혼자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 자신 발화자인 동시에 청자가 된다. 말하기는 청자를 상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봐야 할 정도이다. 즉 그러니 예를 들면 카메라 앞에 혼자 있는 사람에게는 그가 무얼 하든 하지 않든 간에 그것이 말하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면 자신이 혼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 살아 있다는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로 그가 언제 어디에서 무얼 하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말하기로부터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 말을 내내 온몸으로 뿜어대고 있는 것이다. 침묵(을 말)하려 할수록 침묵이 달아나는 것과는 반대로 말에서 벗어나려 할수록 우리는 여전히 말하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말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것은 말하기에 대한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침묵이라는 이름표를 지우는 첫 번째 작업이다. 우리에게 이제 침묵은 없다.


나아가, 말과 침묵의 이분법 대신에 나는 말을 가능케 하는 두 추동을 제시하려 한다. 알아차릴 수 있는 것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말은 언제나 저 둘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함께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서 성립된다고 말하고 싶다. 내뿜어지는 말은 알아차릴 수 있는 것과 알아차릴 수 없는 것 혹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이 한꺼번에 전달되며 그렇게 인식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 구성의 비율이 명확하다거나 각 성분의 정체들이 온전히 전달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 오해되고 착각되기까지 하는데 그래서 간혹은 차라리 어떤 말은 하나도 이해되지 않더라도 이해된 척하는 편이 궁극적인 소통에 있어서 나쁘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을 정도이다. 그렇게 이해하는 척하는 것 또한 알아차릴 수 있는 것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든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척하는 것 또한 말로서 교통하고 소용되며 다음에 이어질 말들을 유도한다. 반대로, 그 말의 의미를 모두 알아차렸다고 생각할지라도 거기에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아직 있기 마련인데, 왜냐하면 알아차린다는 말 자체가 이미 알아차리기의 한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어떤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언제나 못 알아차리는 것들을 제외하고 알아차린 것이 있다는 뜻이다. 그 경우에도 당연히 그것은 즉각적으로든 사후적으로든 그 나름대로 말로서 교통하고 소용되거나 또 다른 말들을 유도한다. 그러니까 말이란 것은 정말로 그 말의 화자에게나 청자에게나 온전히 이해되기 불가능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말의 본질인 것이기 때문에 알아차리다라는 동사의 사용이 필요한 것이다. 본질적으로, 말은 의미를 담거나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거나 (잘)못 알아차리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온전하고 명확하게 전체를 이해하는 쪽보다는 (겨우 가까스로) 눈치채는 것에 더 가까운데, 그것은 단순히 전체 중 일부만을 열악하게 이해하는 것만은 아니며 오히려 전체 중의 일부만으로도 전체를 감히 파악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해를 무릅쓰고 넘겨짚는 것이며 말을 정확히 들었다거나 봤다고 하기보다는 무슨 말인지 안다고 착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알아차리기는 언제나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전제하고 있고 심지어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들 투성이 속에서 겨우 조금만을 알아차리는 것이 알아차리기의 진정한 뜻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수면 아래에 손을 넣어 더듬거리다가 물고기 떼 중 어느 하나의 물고기만을 겨우 낚는 것이다. 말의 전체가 과연 물고기 떼 전체인지 아니면 바다 전체인지도 모르는 채로 우리는 물고기 한 마리에도 기뻐하고 만족한다. 물고기 한 마리로 우리는 물고기 떼와 바다를 확인했다고 착각한다. 그것은 멋진 일이다. 서로 다른 물고기를 잡은 화자와 청자가 서로 같은 바다를 영유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알아차리기와 알아차리지 못하기가 연결되어 있는 방식이다. 알아차리기와 알아차리지 못하기로 구성되는 말하기라는 것은 그 본질이 위태롭고 불안정하고 정확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지만 바로 그것이 말을 교통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그 가능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어를 뛰어넘는 말의 역량을 체험해야 하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전혀 모른다고 믿는 언어로 발화되는 말의 앞에 서서, 혹은 비언어적이라고 불리는 것들 투성이의 어떤 발화 앞에 서서, 그 말들을 온몸으로 받아내 봐야만 한다. 무슨 말이냐면, 내가 알아채지 못할 뿐인 말의 앞에 서 있을지라도 나는 뭔가를 알아챈다고 믿고 싶어 할 것인데 바로 그러한 시간을 통해 거기에도 말이 있다는 것을 체감하여 알게 되고, 말은 발화되는 그 기호들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 즉 시공간의 몽타주들을 통해서 알아채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야말로 불현듯 알아채게 된다면, 명확성으로 무장된 것처럼 보이는 내가 아는 언어로 흠 없이 발화된 말도 그와 같이 사실은 불명확성과 불안정성의 우글거리는 시공간의 산재 속에 있는 별 다를 것 없는 모양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전혀 모르겠는 말에도 내가 알아챌 수 있는 것들이 있고 반대로 내가 확실히 안다고 생각하는 말에도 내가 알아채지 못한 것들이 있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말 앞에서 겸손해지기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면, 내가 뿜어대는 말 또한 그것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되더라도 방도가 없는, 날 떠난 발 없는 말이다. 그것은 말 뒤에서 겸허해지기이다. 즉 그러니까 전혀 다른 방식의 말하기 앞에서 말문이 막힌 채 아무것도 모르겠는 시간의 체험이 우리에겐 더 필요하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고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할 때, 우리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팔만이 아니라 온몸을 휘저으며 말로 가득한 그 시공간 속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을 잡으려 할 것이다. 또한 못 알아차리는 것에 대해서 겸허히 받아들이며 못 알아차리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하여도 어쩔 수 없음에 대해, 하지만 거기에도 어떤 말이 분명 있을 것임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과연 말의 주고받음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 위해서는 그다음 문제인, 대화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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