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눌루랄라
MBTI의 인기는 이제 많이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나는 MBTI 신봉자다. 어찌 고작 16가지 유형이 인간의 모든 면면을 분류하겠냐만은, 공통분모가 많은 사람들이 같은 MBTI를 가지는 걸 보면 그것이 '사이언스'가 아니면 무엇일까. 어쨌든 A, B, O, AB 네 가지에 그쳤던 혈액형론(?)에서 벗어나 16가지나 되는 지표로 분석될 수 있다는 건 인류의 비약적인 성장이다.
MBTI에 대한 설명은 거두절미하고, 20대 초반까지 내 MBTI는 일관되게 ENFP였다. 계획도 없이 떠나는 즉흥 여행을 즐기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게 가장 싫었던 지난날의 '유희 인간'을 떠올리면 나는 확신의 '엔프피'였다. 지금의 ENFJ로 바뀐 건 일을 시작하고 난 후였는데, P(인식형, Perceiving)와 J(판단형, Judging) 유형은 실생활에 대처하는 방식에 있어 두드러지는 차이가 난다.
언제 어느 시점부터, 어떤 계기로 바뀐 것인지 정확하게 특정할 수는 없지만 51:49 정도의 비율로 계획과 즉흥, 체계와 모험 사이를 넘나들던 내가 이제 불변의 J형이 됐음을 확신할 수 있었던 건 공연을 거듭하며 현장 가방을 완벽히 구성하고 난 후였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크로스백은 각종 문구류부터 비상약은 물론이고, '이것도 있다고?' 하는 것들까지 갖춰 일명 '도라에몽 가방'으로 불렸다.
확신의 J형 음악노동자, 그녀의 현장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공연과 페스티벌, 방송 등 다양한 현장 경험을 통해 완성한 현장 가방의 모든 내용물을 상세히 공개하기에는 다소 개인적인 부분들도, 또 나만의 '킥'인 부분들도 있기에 우선 기본적인 구성품 몇 가지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처음부터 공연 현장에서의 돌발 상황에 필요한 준비물을 알려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지금도 잊지 못할 당황스러운 순간들을 몇 번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혹시나 이제 막 공연, 엔터계에 입문한 이들이 있다면 '이것만 잘 챙겨도 현장은 문제없다!' 하는 것들만 모아보았으니 다정한 꿀팁이 되길 바라며.
1. 케이블 타이
처음부터 예상치 못한 물건이 나와서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렇지만 업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현장 활용도 1등이기에 첫 타자를 다른 문구류에게 내줄 수 없었다. 만능 케이블 타이만 있다면 어떤 공연 현장이든 두렵지 않다. 주된 용도는 공연 현장 내외부의 수많은 현수막을 걸거나 단단히 고정이 필요한 모든 것에 쓰인다. 가위로 힘주어 자르지 않는 한 결코 끊어지지 않는 튼튼함이 가장 큰 무기이다. 그 어떤 비바람에도 케이블 타이로 고정한 현수막은 천이 찢어질지언정 고리가 끊어지진 않는다. 낱개의 의자들이 제각기 움직이지 않도록 의자들을 연결하기도 하고, 실제 축제 준비 현장에서 태풍에 찢어진 천막을 케이블 타이로 일일이 바느질하듯 엮었던 기억도 난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케이블 타이. 매듭을 연결하면 무한히 연장되는 길이는 물론이고, 다양한 형태로 변형할 수 있기에 약간의 기발함만 발휘한다면 케이블 타이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며, 대단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흰 천으로 제작된 현수막을 연결할 때는 흰색 케이블 타이를, 검은 케이블들을 묶어 정리할 때는 검은색 케이블 타이를 사용할 수 있다면 당신은 센스 만점 스태프. 현장 스태프의 주머니에는 언제나 케이블 타이 아니면 끊어진 케이블 타이가 있다.
2. 각종 테이프
케이블 타이가 현수막이나 케이블 등 무게감 있는 고정력을 책임진다면 테이프는 간단한 고정을 비롯해 종류에 따라서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주로 다양한 색상의 절연 테이프와 접착력이 강력한 청테이프, 깔끔함이 장점인 셀로판테이프(투명 테이프) 세 종류를 사용한다.
다양한 컬러의 절연 테이프는 무대 뒤 제2의 스태프와도 같다. 검은색 절연 테이프는 보통 케이블을 정리하거나 단단한 것들을 부착할 때 사용한다. 공연장 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린 케이블은 미관을 해칠 뿐 아니라 관객이나 스태프, 아티스트들이 지나다니다가 발에 걸려 넘어지거나 음향 사고는 물론, 자칫 감전 사고로까지 번질 수 있는 안전과 직결된 부분이기 때문에 케이블이 이동 동선과 최대한 겹치지 않도록 꼼꼼히 정리해 바닥에 부착해야 한다. 무대 위에서는 보이지만 객석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무대 색상과 동일한 절연 테이프를 이용해 무대의 구획을 나누기도 한다. 공연 시작 전후와 진행 중 암전이 될 때면 어두운 무대 안팎에서 아티스트와 관객들을 안내해 주는 건 은은한 형광빛을 내는 형형색색의 절연 테이프(마스킹 테이프)다. 무대로 향하는 길이나 조심해야 할 계단 등의 모서리에 부착해 길을 안내하기도 하고, 무대 위에서 각 아티스트들의 위치를 잡아둔다. 관객 동선에 따라 바닥에 부착하는 경우도 있고, 하우스에서는 어둠 속에서도 헷갈리지 않고 조명이나 음향 기기 등을 조작할 수 있도록 부착하기도 한다. 케이블 타이만큼이나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가장 자주 쓰는 것이 바로 이 절연 테이프일 것이다.
스태프들 사이에서 자주 쓰이는 절연 테이프의 또 다른 용도는 보조 배터리나 외장하드 등 부차적인 아이템들을 고정하는 것이다. 특히 카메라나 핸드폰, 최근에는 QR 체크인을 위한 태블릿 PC 등 스태프가 지니거나 챙겨야 할 수많은 전자기기의 보조 배터리를 일일이 들고 다니는 것은 너무나 번거롭고 가뜩이나 모자란 손을 더욱 바쁘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스태프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기기에 보조 배터리를 고정해 사용하는데, 그 어떤 거치대 보다도 절연 테이프가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청테이프나 셀로판테이프는 주로 지류 홍보물을 부착하는 데에 사용되는데, 부착하는 벽이 어떤 소재인지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청테이프는 강력한 접착력을 자랑하기 때문에 동그랗게 말아 안쪽으로 부착하면 잘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깔끔하게 포스터를 부착할 수 있다. 하지만 페인트칠을 한 벽이나 벽지, 필름 등 마감재에 따라 벽이 망가질 수 있고, 접착제가 남을 우려가 있어 대부분의 공연장에서는 지류 부착이 가능한 벽과 선호하는 부착 방식 등을 정해두는 경우가 있으니 사전에 잘 체크했다가 요청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 셀로판테이프는 접착력이 조금 떨어지는 반면 부착면이 잘 보이지 않아 깔끔하다는 장점이 있어 유리문이나 아크릴판 등 투명해서 어느 쪽에서나 부착면이 보이는 경우 선택하면 좋다. 현수막과 함께 포스터는 관객들이 공연장에 와서 가장 많이 사진을 찍고 공유하는 포토존이기 때문에 좀 더 세심한 신경을 기울여 깔끔하게 부착할 필요가 있다. 파란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있고 여기저기 울거나 삐뚤빼뚤하게 부착된 포스터가 SNS에 돌아다니는 건 글쎄, 윽!
3. 펜과 메모지
사실 이건 현장뿐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나 소지해야 할 필수품이라 굳이 적어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만큼 어디에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챙기지 않았던 날에는 어김없이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어 꼽아보았다. 나는 주로 몇 가지의 펜을 챙기는데, 아티스트 사인용 펜과 삼색 볼펜, 형광펜 정도다. 메모지는 포스트잇 하나 정도면 된다. 공연이나 특히 방송 촬영 현장에서는 갑자기 사인 CD를 준비해야 하는 경우가 있고, 아티스트가 사인 요청에 응해야 하는 상황도 있기 때문에 네임펜이나 마카를 준비하는 게 좋다. 굵기가 얇지 않고, 지류뿐 아니라 천이나 플라스틱 등 다양한 소재도 문제없이 사인할 수 있어야 한다. 사인해야 하는 지류가 어두운 색일 경우 잘 보일 수 있도록 흰색이나 은색 마카를 준비한다면 다시 한번 센스 만점. 색깔 펜과 형광펜은 주로 큐시트와 같이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공유하는 자료에 변동된 내용이나 중요한 내용 등을 체크할 때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준비하는 것이 좋다. 펜이 있어도 용지가 없으면 꽝인 경우도 있다. 주로 급하게 들어오는 관객 요청과 관련해 메모를 해야 할 때다. 일반적으로 공연장에는 안전상의 문제로 음료나 생화 등 반입이 금지된 물품들이 있기 때문에 별도로 운영되는 물품보관소가 없다면 급한 대로 관객의 물품을 안내 부스에서 보관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때 포스트잇이 있다면 추후 물품을 찾는 데에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관객의 성함과 연락처 등을 기재해 물품에 부착해두기에 유용하다. 이 외에도 없으면 꼭 필요해지는 것이 바로 이 펜과 메모지니 어딜 가나 이 두 가지는 항상 챙기는 버릇을 들이자.
4. 가위와 칼
안전한 현장을 위한 기본이 단단한 고정이기 때문에 반대로 현장 철수 시에는 그만큼 가위와 칼이 필수다. 꼼꼼히 엮은 케이블 타이나 테이프들을 뜯고 자르는 건 가위나 칼이 아니면 할 수 없다. 패킹된 물품을 풀어야 하는 일이 잦기도 하고, 갖추고 있으면 반드시 어디서든 유용하게 쓴다. 펜이나 메모지와 마찬가지로 굳이 꼽아야 할까 고민할 만큼 모든 업무에 있어 기본적인 사무 용품이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기로 한다.
5. 건전지
생각보다 필요한 경우가 잦다. 공연 현장이 수많은 전자기기들의 화음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그리 예상치 못할 물품도 아니지만 나는 몇 차례 건전지를 사러 급히 근처 편의점을 향해 뛰었던 경험이 있다. 그 후로는 현장에 나가기 전 많지는 않더라도 한 두 개 정도 여분의 건전지를 준비한다. 내 경우 주로 필요한 건 네모난 형태의 9V 건전지와 가장 일반적인 AA 건전지였는데, 9V 건전지는 어쿠스틱 기타에 사용되기 때문에 주로 어쿠스틱 기타를 사용하는 아티스트가 준비하곤 하지만 혹시 모를 방전에 대비해 여분으로 준비해둔다. AA 건전지는 가장 많이 쓰이는 만큼 방전된 경우도 자주 본다. 하우스에서 여러 기기들을 컨트롤하는 리모컨이나 코시국에 필수로 구비해두어야 하는 비접촉식 체온계 등에서 그렇다. 어쿠스틱 기타를 사용하는 아티스트가 9V 건전지를 준비하는 것처럼 이 역시 기기를 보유한 업체나 공연장 측에서 준비해 두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만일의 상황이 벌어진 현장에서는 미리 준비하지 못한 지난날의 책임을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일단 내 주머니에 있는 것을 꺼내 사태를 해결하는 것만이 우선일 뿐.
잠깐, 이게 다 어째서 A&R의 현장 가방 속 물품들이냐고?
느꼈겠지만 A&R이든 공연 스태프든, 누구든 정해진 일이라는 건 따로 없는 게 현장이라는 것, 그게 이 글의 핵심이다. 기왕 하는 거, 잘 해내면 더 좋은 N잡것의 현장 가방은 공연 현장의 변화에 맞춰 앞으로도 진화를 거듭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