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굴리는 가사
온갖 말과 표현의 장이 되는 노랫말, 이미 대단한 문장으로 보이는 가사라도 그 내용을 파고 들어가다 보면 더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때도 있죠. 그렇게 가사를 탐험하던 두 명의 음악노동자가 본격적으로 '가사'를 읊어보려고 합니다. <가사다라마바사>라는 다소 어리둥절한 타이틀에 걸맞게 무슨 영문인지 잘 모르겠는 가사부터 너무 황홀해서 얼떨떨한 가사까지 하나씩 들춰볼게요. 저희와 함께 '어? 나 이런 가사 좋아하네?' 라며 각자의 가사 취향을 발견해볼 수 있다면 좋겠고요. 장르 불문, 시대 불문, 국적 불문 방대한 음악 세계에 포진한 갓(god)사들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거니까 다들 나름의 방법으로 잘 소화시켜 보자고요.
그럼 오늘은 김해피와 눌루랄라의 '생각을 굴리는 가사'라는 주제로 슬- 시작해 볼게요.
노땐쓰 ٩( ᐛ ) 달리기
Lyricist 박창학
시작부터 너무 명곡을 꼽아버리면 진부한가요? 그러나 진부하다는 표현을 갖다 붙이기에 <달리기>는 노랫말 하나로 마음을 이리저리 울리는 걸요. 가사만 보면 가볍게 위로하는 말일뿐인데 어째서 음과 말의 잔향이 유독 조용하고 묵직하게 남는 지를 생각해보게 됐어요. 이유를 이 곡의 가사가 유독 이중적으로 해석되어왔던 것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김해피가 청소년이었을 때 즈음 달리기 가사에 자살을 암시한다는 해석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교복 입은 김해피는 처음 접한 해석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살 암시라는 해석을 만나기 전까지 그렇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후 원작자의 의도와 설명을 듣고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 지금까지도 제가 와전된 해석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게 종종 놀랍습니다. 듣는 이에 따라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지만, <달리기>는 희망과 절망이라는 너무나도 양가적인 해석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요.
‘가사’는 그 자체로 너무 직관적인 요소라 플레이리스트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필터가 되기도 하지요. 만약 여러분의 플레이리스트를 오늘의 기분으로 분류한다면 <달리기>는 신남, 우울, 공허 아니면 그 사이 어디쯤으로 요리조리 필터링이 될지 궁금하네요. 각 잡고 다양한 버전으로 들어본 제 감상은 이랬습니다. *S.E.S, SG워너비, NATURE(네이처) 버전의 달리기는 정말로 노래를 따라 신나게 달리고 싶기도, 자유의 코앞에 다가선 기분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또 가만가만 말하듯 노래하는 *윤상, 옥상달빛 버전은 버거운 현실에 초연해진 사람처럼 느껴져서 밝고 통통 튀는 사운드 위에서도 가끔은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진보(조원선, 자이언티)의 달리기를 들으면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누워서도 죽음을 상상하는 화자가 그려져 애처롭기도 했고요. 이러쿵저러쿵 복잡한 시대에 태어나 본의 아니게 다방면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어 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96년에 발매되어 26년째 리메이크와 커버가 끊이질 않고 여전히 수능 인기곡으로 손꼽히고 있으니 말이에요.
*아티스트 이름에 링크된 각 버전의 달려달려 달리기...
작품 해석을 할 때 '작가의 의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견해와 작품이 세상에 공개된 후에는 '독자의 해석'을 저해해서는 안된다는 이견이 있지요. 두 의견을 절대적으로 분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달리기>는 원작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제는 듣는 이의 몫이 된 쪽에 가까워졌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절망의 해석이 자꾸만 퍼지는 것에 사회의 우울한 시대상이 반영된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도 드는 <달리기>의 가사. 재즈풍의 편안한 리듬으로 재탄생한 ‘진보(조원선, 자이언티)’ 리메이크 버전으로 읽어드립니다.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입이 바싹 말라와도 할 수 없죠 창피하게 멈춰 설 순 없으니.
이유도 없이 가끔은 눈물 나게 억울하겠죠. 일등 아닌 보통들에겐 박수조차 남의 일인 걸.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에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It's good enough for me, bye bye bye bye
_ 『달리기』가사 중
전영록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Lyricist 유명진
여러분은 음악의 역할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기분을 전환해주기도 하며, 어떤 장면들은 그날의 음악으로 기억되기도 하죠. 한국 대중음악이 1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오며 이제는 세계시장의 주역이 된 K-Pop은 거대한 경제적 가치를 낳기도 했고요. 개인적인 삶에 있어 음악의 역할을 떠올려보자면, 아이돌 산업에 심취되어 있던 10대 시절엔 또래문화를 공유하는 소속감 같은 것이었고, 인디 음악에 빠져 라이브 클럽을 전전하던 시기엔 자아를 확장하는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A&R로 일하고 있는 지금 저에게 음악은 주된 수입원이자 마케터로서 늘 고민해야 하는 미래 가치의 연구 대상이기도 하죠. 음악을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음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건 이처럼 음악이 가진 다양한 사회문화적 기능들 때문일 겁니다.
그중에서도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생각하는 음악의 역할은 한 시대를 담은 기록물로써 존재한다는 겁니다. 한 사람의 이야기가 한 장의 앨범이 되고 나아가 하나의 역사가 되기까지, 음악은 소모되어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 자리를 지키며 전해지고, 쌓여가고, 재평가되기도 합니다. A&R로서 자부심과 함께 수치적인 결과를 떠나 계속해서 좋은 음반들을 기획하고 세상에 내야 할 책임감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러한 부분이에요.
더 길어지면 따분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이쯤 하기로 하고, 그래서 제가 소개하고 싶은 가사는 1983년에 발표한 전영록 님의 곡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입니다. 발매된 지 40년이 가까이 된 곡이지만 기록물로써의 가치를 차치하고 봐도 이 곡의 가사는 재치 있는 은유로 사랑에 대한 고찰을 이야기합니다.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쓴다면 지우기가 어려우니 사랑을 쓸 땐 연필로 쓰라니. 설렘에 부푼 첫사랑에 밤새 이불 좀 차 봤던 사람이라면, 철없는 풋사랑에 가슴앓이 좀 해본 이들이라면 마음을 비워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이보다 잘 표현한 가삿말이 또 있을까요.
기록물로써 바라본 이 가사의 가치는 저물어가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성을 그대로 간직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 PC가 종이와 연필의 자리를 대신하는 지금, '사랑을 쓴다'는 표현이 그리는 장면은 세대에 따라 모두 다를 겁니다. 종이에 한 자 한 자 눌러쓰던 시대를 지나 수화기 너머로 마음을 전하던 시대를 거쳐 터치 하나로 시공간을 뛰어넘는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가올 미래에는 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당장 10년 앞의 일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제 곧 나무 연필과 고무 지우개가 역사책 속에나 존재하는 세대를 만나게 될 거예요. 연필로 쓴 글씨는 고무로 만든 지우개로 지울 수 있다는 사실을 할머니, 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만날 세대에게 이 곡은 또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요. 어쩐지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가사가 가진 아날로그 감성이 꽤나 가치 있게 느껴졌던 건 저 마저도 '잉크'라는 단어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었을까요.
꿈으로 가득 차 설레이는 이 가슴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사랑을 쓰다가 쓰다가 틀리면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야 하니까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사랑을 쓴다면
지우기가 너무너무 어렵잖아요
_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가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