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구멍 틀어막기
눈이 침침해진 걸 보니 나의 대퇴사두 근육도 빠졌으리라. 나이 들면서 신체 기능이 저하되는 건 자연스러운 섭리여서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이유인지 나의 청력은 날이 갈수록 예민해지고 있다. 아마도 몸의 일이 아닌 마음의 일이지 싶다.
보기 싫은 것은 눈을 감으면 그만이지만 예민해진 청각이 무단으로 수집하는 소음에 나는 속수무책이다. 에어팟을 끼면 되지 않냐고 말하지 말라. 청각이 예민하다는 의미는 음악, 영화는 물론이요 쇼팽의 녹턴에도, 바흐의 무반주 첼로 선율에도 쉽게 피곤해진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나는 ‘자칭’ 프로 출장러다. 출장은 혼자 다닌다. 일행이 부재한 출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자유와 아무 말도 듣지 않을 자유가 보장되는데, 나는 이 자유가 좋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 말하지 않을 자유는 철통같이 보장되지만, 듣지 않을 자유는 시도 때도 없이 박탈당한다.
기내에서 대화는 소음이다. 못 알아듣는 언어는 자체가 소음인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알아 들어서 버겁다. 들려서 들은 그 궁금하지 않은 얘기에 맞장구를 쳐줄 수도 없고, 내 생각은 다르다고 항의할 수도 없어서 나는 몸을 비틀며 환장한다.
이때 프로 출장러인 내가 승무원을 부른다. ‘귀마개 주세요’ 대한항공은 귀마개(ear plug)를 제공한다. 비즈니스 클래스에는 기본이고, 일반석에서는 달라면 준다. 귀마개는 단일 사이즈다. 길다. 귀마개 뒷부분을 손으로 찢어서 길이를 줄인다. 손가락 끝으로 오물조물 오므린 다음, 귓구멍에 밀어 넣는다.
스펀지가 귓속에서 부풀어 오른다. 이퀄라이져로 4Khz 이상을 컷오프 시킨 듯한 뭉툭한 소리에 사위가 아득해진다. 귀로 수음되는 모든 데시벨이 줄었다. 깔깔 웃음소리가 ㅋㅋ로 들린다. 주변이 고요하다. 소음을 피하겠다고 더 큰 음악으로 귀를 틀어막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고요함이 좋다. 내 귓구멍을 틀어막는 것으로 혼자 출장 가는 자의 아무 말도 듣지 않을 자유와 여행으로 들뜬 자의 수다는 비로소 공존된다.
방심은 금물. 귀마개로 해결되지 않는 막강한 깔깔 호호 헤비 토커를 조심하라. 만약 그런 사람을 만났다면 귀마개에 안대와 레드와인을 더한 삼종 세트를 활용해서 신속하게 기절모드로 전환한다.
만약 당신이 혼자 가는 출장에서 퍼스트 클래스를 타지 않았다면 귀마개 혹은 기절 삼종 세트는 매우 유용한 기술이 될 것이다.
야, 이제 너도 혼자 출장 갈 수 있어.
출장의 기술.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