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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난 Mar 21. 2021

조금만 기다리면 아무렇지 않을 일

열흘 전에는 수술을 했다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귀에 자리 잡고 있던 아주 작은 구멍,

이루공을 없애는 수술이었다

귀의 위쪽을 조금 찢고 그 속에 들어있던 주머니를 떼어내고

다시 벌어진 부분을 꿰매면 끝나는 수술이었는데

국소마취를 하고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수술을 마치고 나와서

귀에 거즈를 붙이고 사는 일주일 동안

일을 하고 놀고 이러저러 볼일을 보는 동안

무슨 일이냐 걱정해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붕대를 붙이지 않은 대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붕대를 귀에 붙인 내 얼굴은

확실하게 눈에 띄는 모습이었는데

아침에 신경을 써서 붕대를 잘 안 보이게 붙여도

어김없이 짧은 머리카락 사이로 하얀 붕대가 삐져나와

여러 사람의 눈에 걸려서

그때마다 입을 열어 설명을 했다


어떤 때에는 유머를 보태서 조금 길게 하고

어떤 때에는 브리핑을 하듯 조금 짧게 하고

어떤 때에는 무용담처럼 과장을 좀 보태고

어떤 때에는 수술 현장에 있듯 묘사를 더하면서

일주일이라면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관심이지만

일주일이 넘어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면

이거 좀 곤란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일주일 동안 두 번 만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만 나의 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요가 선생님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셔서 나도 아무렇지 않게 요가를 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다른 수강생과 다름없이

오늘은 무엇이 잘되고 무엇이 안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귀에 붕대를 붙이고 있지만

나는 똑같이 요가를 하러 온 사람,

나는 똑같이 머리 세우기가 안 되는 사람,

나는 똑같이 쟁기자세가 잘되는 사람이었다


붕대를 풀고 삼일이 지났고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서 요가에 갔다

수업이 끝나고 기진맥진한 채로 바닥에 앉아 잠깐 수다를 떠는데

선생님의 어떻게 지내셨냐는 질문에

내가 스스로 헤어밴드를 뒤로 밀어 귀를 드러내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선생님은 신경 써서 듣고 보고

수술 전에도 한번 봤으면 좋았을 뻔했어요! 라며 궁금해했다

아주 즐거운 대화였다


집에 돌아와서 현미밥을 안치고 김치찌개를 끓이면서

이런 관심은 어떤 것일까를 생각했다

눈에 뻔히 보이는 것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관심

남들과 달라 모나고 튀는 것 대신

남들과 같아 비슷하고 둥그런 것을 찾아내는 관심

그것은 안전하고 기분 좋은 관심이었다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세심하고 멋있는 관심이었다


김기홍 님과 변희수 님의 죽음 소식을 들었다

내가 아는 카메라 앞에서 주장하고 언론에 나와 활동하는

트랜스젠더는 없게 되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누가 용기를 내어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아마도 남들과 다른 삶을 조금도 살고 싶지 않았는데

남들이 매일 매시 매분 다르다고 말해주니까

어쩔 수 없이 다르게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눈코입귀, 머리색과 하는 말, 걷는 모습과 좋아하는 음식

공통점을 찾자면 백개도 순식간에 찾아낼 수 있으면서

다른 점 하나를 굳이 찾아내

아주 아주 다르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어떤 날에는 백 명이고 천명이고 전부다

아무리 건강하고 아무리 부지런해도

이토록 소수의 사람들이 천만명, 수억 명과 맞설 수는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어 정말로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실 별로 다르지도 않은데.


차별에 반대한다거나 평등을 위해 싸운다고 하면

대단한 운동가나 사회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일 거 같지만

사실은 별것도 아니지 않을까

다른 것 하나 대신에 아흔아홉 가지의 공통점을 보는  것

하나의 다른 점만 보는 눈을 잠시만 감아두는 것

그래서 사실은 별로 다르지도 않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를 주는 것


일주일이 지나 병원에 다시 가서

실밥을 풀었는데도 뭔가 귀가 좀 불편하고 이상해요.

라고 말하자 의사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처음에는 좀 그럴 수 있는데,

곧 아무렇지 않아 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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