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생일 때부터, 로봇을 가지고 노는 것보다 로봇을 만드는 놀이가 더 재밌었다. 누가 그랬나 덕질의 끝은 창작이라고. 하지만 꼬마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조립형 레고 장난감이었고, 그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끝까지 가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우연히 가게 된 로봇 전시에는 어른의 상반신 크기만 한 로봇들이 있었다. '그래, 이거지' 싶었다.
이때부터 12~13살 형들이 다니는 동네 로봇 교실에 등록해달라고 부모님을 졸랐다. 직접 나보다 큰 로봇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겨우 8살짜리가 형 누나들이 다니는 동네 로봇 교실에 들여보내달라고 떼를 쓴 거다. 하지만 엄연히 ‘청소년’ 수련원인데 무작정 들여보내 줄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간절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나이로는 자격 미달이었지만 참관 수업을 허락받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어차피 어린 아이니까 금방 흥미가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거나, 수업 진도를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을지도.
그리고 대망의 참관 수업에서 첫 과제를 받았다. 각자 만들고 싶은 로봇을 구상하고, 그 로봇에 대한 기획안을 짜 오는 것. 그 과제는 학생들이 수업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 확인하는 일종의 테스트였다.
그런데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이 무슨 대단한 문서를 만들겠는가.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했지만 A4용지에 손으로 삐뚤빼뚤 글씨를 쓰고 직접 그림을 그린 게 최선이었다. 반면 형, 누나들은 파워포인트와 엑셀을 사용해 그럴듯한 기획안을 가져왔다. 너무나 비교되는 기획안들을 보니 내가 가져온 기획안은 숨기고 싶을 정도로 초라해 보였다.
아 나는 더 이상 수업을 듣지 못하겠구나
당연히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 수준으로 어떻게 진도를 따라가겠나. 어떻게 비집고 들어온 수업인데… 아쉽지만 마음을 접어야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수강생의 절반은 기획안을 아예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선생님은 호통을 치며 ‘이렇게 어린애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만들어 왔는데 너네는 뭘 했냐’라며 그 형들을 모두 제명시켰다. 반면 자격 미달이었던 나는 로봇 교실에 정식 수강생으로 남게 되었다. 되든 안 되는 일단 도전하고, 결과물을 보여줬으니까.
그리고 2년 뒤에는 기어코 한국 대표로 세계 로봇 올림피아드에 출전했다. 두꺼운 쇠 프레임을 공장에서 잘라 와서 조립한 뒤, 회로를 짜고 동작할 수 있게끔 프로그래밍하는 과정까지 선생님과 함께해서. 원격으로 조정해서 산불을 끄는, 당시로서는 꽤 난이도가 높은 기술이 탑재된 로봇이었다. 덕분에 올림피아드에서 기술상을 타낼 수 있었다. 이때만 해도 어릴 때의 난 스스로 로봇공학자가 되리란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로 몇 년간, 로봇 산업은 발전이 더뎠다. 머지않아 새롭고 유용한 로봇이 나와서 실생활에 사용되리라 기대했는데 그럴 기미가 어린 내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다가는 20년이 지나도 내가 상상했던 멋진 로봇들이 실생활에 사용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로봇 공학자가 되어도 로봇을 만들기는커녕 실험실에서 연구만 하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로봇에 대한 흥미는 점점 식어갔고, 로봇 공학자가 되겠다는 꿈도 흐려졌다. 결과적으로 초등학교 시절을 전부 쏟아부은 노력들은 그다지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그렇게 꿈이 사라진 채로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한 번도 꿈이 없었던 적이 없는데, 초등학교 시절 내내 로봇과 살았는데 갑자기 인생의 방향성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곤 게임에 빠져들었다.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에 피파 온라인 2,3를 모두 섭렵해 나갔다. 방과후에 3~4시간씩 모니터 앞에 앉아 전설 캐릭터(선수)를 뽑고 팀을 구성해나갔다. 현질과 강화의 콤보로 멋진 선수들의 스탯을 올려가며 노력한 결과, 게임 레벨로 전교 1등까지 달성했다. 한번 빠지면 끝까지 가 보는 기질은 여전했다.
그런데 게임이 업데이트 되면서, 갑자기 내가 가진 캐릭터들이 전부 사라진다는 공지가 떴다. 당시 피파온라인 3가 새롭게 나오는 과정에서 피파온라인 2의 데이터가 전부 무의미해진 것이었다. 너무 억울했다. 내가 투자한 시간과 노력, 소유한 캐릭터들을 전부 부정당하다니. 또 한 번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게임회사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내 세계가 다시 한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통보받고 낙담하는 수밖에. 그렇다고 소송을 하거나 시위를 벌일 건 아니니까. 억울하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꿈도 취미도 무너진 채 대학에 진학했다. 여전히 내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일은 좋았어서 일단 공대에 갔다. 일단 축구도 열심히 했다. 다만 무얼 해 야할지 모른 채로 적지 않은 방황의 시간들을 보냈다. 나름 그걸 찾아보겠다고 1년 동안 내 전공이 아닌 다른 학부의 전공 과목만 골라 듣기도 해 봤지만 온전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일의 교집합은 전혀 의외의 분야에서 나타났다. 게임에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하면, 플레이어가 게임 아이템을 정말 영구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변조가 불가능에 가까운 블록체인에 게임 기록을 남긴다는 아이디어다. 어떤 플레이어가 무슨 자산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기록이 누구나 볼 수 있는 데이터로 남으니까 게임 운영이 종료되어도 내 아이템의 소유권은 인정받을 수 있었다.
게임 아이템은 단순히 게임 내에서만 쓰이는 도구가 아니다. 나에겐 자산인 동시에 소중한 추억이었다. 플레이어의 아이템을 플레이어에게 돌려주는 기술이라니 취지가 좋았다. 실제로 플라네타리움라는 기업은 이른바 ‘웹3 게임’에 블록체인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었고, 나는 그곳의 사내 투자팀에서 인턴을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회사와 집이 멀어서 이동하는 데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야 했다. 이러면 업무에 집중하기 어렵겠다 싶었다. 그래서 회사와 가까운 주거지를 찾다가, 논스라는 코리빙 하우스에 들어오게 됐다.
논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학교나 사회에서 보던 사람들과 달랐다. 이들은 거침없이 도전한다. 예를 들어, 곧바로 다음 달 미국에서 이더리움 해커톤이 열리면 그냥 참가한다. 상금을 타지 못하면 비행기 티켓값을 날리는 셈인데 그래도 일단 도전하고 본다. 겨우 16명의 인원이 모인 논스 4호점에서 세 달 동안 6~7개의 팀이 해커톤에 참여할 정도다. 마치 일단 무작정 해 보는 사람들만 일부러 모아둔 것 같았다.
나도 그 흐름에 자연스레 탑승했다. 작년과 올해 열린 이더리움 해커톤 ‘이드 서울(ETH Seoul) 2022’, ‘이드 도쿄(ETH Tokyo) 2023’에 참가했는데, 운이 좋게도 두 해커톤 모두 참가한 트랙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로봇 올림피아드 때처럼 이번에도 나의 실력이 탁월해서는 아니었다. 다른 참가자들보다 블록체인에 대해 뭔가를 엄청나게 더 잘 알아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결과가 어떻든 그저 도전하고 끝까지 매달렸기 때문이다. 내겐 무언가를 만들 때 이게 전부인 것 같다.
위험을 감수하는 성향은 전염된다. 주변에 도전적인 사람이 있으면 나도 용기가 생겨난다. 논스에 도전하는 문화가 있는 이유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감한 사람들을 모아두니 새로운 뭔가가 자꾸 생겨난다. 그중에 많은 것들이 실패하겠지만 우리는 실패로부터 배우고 다시 도전한다. 그러면 그중에는 입이 쩍 벌어지는 성과도 종종 나오곤 한다.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에 도전해 끝까지 매달렸으니까.
꿈이 없는 삶, 도전이 사라진 삶은 지루했다. 잘 모르는 분야라서 겁이 나더라도 일단 뛰어들고 나면 목표가 생기고, 목표가 있으면 돌파구를 찾는 데 몰두하게 된다. 내겐 그 과정을 겪어야만 재미라는 보상이 따라왔다. 이런 걸 보면 진정한 재미는 도전에서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논스에 사는 경험이 재미있는 것도 도전하는 문화 덕분이다.
도전하는 사람이 모여있으니 서로에게 자극받아 계속 도전하고 재미를 느끼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매일매일이 똑같지 않은 삶. 도전하는 삶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은 논스에 도전하기를 바란다.
2023년, 많은 변화들의 한 가운데에서
원종범 드림.
* 이 글은 논스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기반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