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 새 연재 '지속가능한 여행의 기술'을 시작하며
"요새 뇌과학 다큐 준비 중인데, 행동경제학이 진짜 재밌더라.
아참, 너 그거 공부해봐. 여행이야말로 이 이론이 딱 들어맞는 분야라고"
시작은, 경제학도들의 '몹쓸' 술자리
몇 년 전 대학 동기끼리 맥주 한 잔 하던 중, 방송국 피디 녀석이 내게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술맛 떨어지게, '경제학 공부'라니.(...) 문득 녀석들과의 까마득한 대학 시절이 떠오른다.
전공인 경제학은 '등교 기피증'이 절로 생기는 학문이었다. 미국에서 갓 부임하신 교수님은 원서로 강의하고 영어로 시험을 내셨다. 나와 몇몇은 <맨큐의 경제학> 한국어판을 몰래 구해와서 가까스로 진도를 따라가는 스터디 모임을 만들었다. 녀석들에겐 그 모임이 대단히 도움이 되었는지, 첫 시험에서 모두 A를 받았다.
자비 없이 휘갈겨진 F를 두 번이나 받은 건, 나뿐이었다. 졸업 후 커리어 역시 경제학과는 가급적 멀리 떨어진, 여행 기자와 마케터 등을 거쳐 기업 강사에 안착했다. 그렇게 경제학은 내 삶에서 '손절'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날의 술자리 후, 나도 모르게 행동경제 관련 책에 자꾸만 손이 갔다. 알면 알수록 대학 시절 배운 경제학과는 인간과 시장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외로 '여행'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몇 권의 책을 쓰면서도 속 시원히 풀리지 않던 여행 소비의 심리가, 경제학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흥미롭게 풀리기도 했다. 여행이라는 키워드를 바라보는 프레임의 전환은, 경제경영서로 분류되는 저서 <여행의 미래>의 밑거름이 되었다.
관광 분야의 학문은 공급자(항공, 호텔, 관광 등)의 시각으로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해외여행 대중화 20년이 흐르는 동안, 여가 소비의 권력은 소비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여행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행태를 최초로 조명한 트렌드 도서 <여행의 미래>가 무려 2020년 코로나 이후 나온 게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수 년간의 변화가 단 1년만에 이루지면서 커다란 생태계 재편을 앞둔 지금, 경험 소비에 대한 새로운 성찰과 가치관을 논의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좀더 풍요롭고 지속가능한 경험 소비를 하려면?
양극화가 만들어낸 비즈니스 모델, '플렉스 이코노미'와 여행
책을 내고 한동안은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포스트-코로나 여행과 관광의 미래에 대한 온갖 기고를 하고 정부 기관 강의와 교육에 불려 다녔다. 이런 일이야 기꺼이 잘 해낼 수 있었지만 학자들 사이에 앉아서 하나마나한 해법이나 던지는 자문위원 행세는, 영 내키지 않았다.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현재 업계에 부족한, 소비자 관점의 시각을 조금 더 뾰족하게 다듬고 싶었다.
나는 MZ세대가 과도할 만큼 욜로와 소확행을 외치며 여행을 포함한 경험 분야에 소비를 집중하는 본질적인 이유에 관심이 많았다. MZ세대는 자신의 소득이나 재정 계획에 비해서, 여행 지출의 마지노선을 느슨하게 풀어왔다. '마일리지 신공으로 퍼스트 타야지', '매달 한 번은 호캉스 플렉스 해줘야지'와 같은 비합리적인 경험 소비는 여행 산업을 크게 성장시켰다. 여행업이 초토화된 코로나 이후에도, 플랫폼을 통한 특급 호텔 거래액은 꾸준히 상승했다. (야놀자, 2020년 특급호텔 거래액 전년 대비 25% 증가)
모든 사람이 부자와의 경제적 격차를 늘 인식하는 양극화 사회에서는, 격차를 이용해 돈을 버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만들어진다. 그것을 나는 임의로 '플렉스(flex) 이코노미'로 정의하기로 했다. 플렉스는 조금만 무리하면 부자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과시성 소비를 일컫는다. MZ 세대의 '플렉스' 소비는 양극화 비즈니스 모델의 대중화로 나타난 현상이다. 주목할 것은 코로나 이전 플렉스의 끝판왕은 '여행' 분야였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경제의 양극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고, 플렉스 현상 또한 함께 심화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던 경험 소비의 이면을 좀 더 깊게 분석해보고, 전 세계 기업들의 치밀한 격차 마케팅과 비즈니스 기법이 우리의 경험에 어떻게 개입해 왔는지 풀어보려고 한다. 때때로 행동경제학의 재미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들도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물건으로 채우지 못하는 정신적인 공허함과 불안을 왜 '여행'과 같은 경험 소비로 채우려고 했는지 성찰해보고, 이러한 플렉스 이코노미가 공동체 정신을 어떻게 서서히 파괴하고 서로를 분열시키는지도 들여다보려고 한다.
왜 비행기에서 이코노미 석을 탈 때마다 비즈니스와 퍼스트 좌석을 '관람'하게 될까?
왜 길고 긴 타지마할 입장줄을 눈앞에서 제치고 들어가서 VIP 여행을 하는 상품이 생겼을까?
왜 프리미엄 쇼핑몰의 개장 소식에 누구보다 일찍 달려가 경험을 '전시'하려 할까?
'앞으로 어떤 경험을 소비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공급자뿐 아니라 소비자인 우리 스스로에게도 되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그래서 좀더 풍요롭고 지속가능한 경험 소비, 나를 성장시키는 경험 투자를 위한 방법, 그리고 양극화를 이용하지 않고도 돈을 버는 윤리적인 기업은 어떤 철학을 가지고 비즈니스를 이끌어가는지도 살펴보려고 한다.
다행히 지금까지 전 세계를 돌며 취재해 놓은 자료가 많아서, 코로나 이후 꾸준히 수집한 트렌드 변화와 함께 풀어볼 수 있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는 올바른 여가 소비에 대한 개인과 기업의 새로운 기준과 방향을 제시하는 메시지를 만들어보고 싶다. 이 연구는 내 업인 여행 교육에 대한 본질을 새롭게 정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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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영 | nonie 강사 소개 홈페이지
- 책 <여행의 미래>, <나는 호텔을 여행한다>, <스마트한 여행의 조건> 저자
- 현 여행 교육 회사 '히치하이커' 대표
- 한국과학기술인력개발원 등 100여개 기업 출강, 2019년 Best Teaching Award 수상
지난 10년간 전 세계를 돌며 여행산업의 변화를 여행으로 직접 탐구하고, 가장 나다운 직업을 만들었다. 일반 기업에서는 임직원의 스마트한 여행을 책임지는 강사로, 여행업계에서는 산업 칼럼니스트와 트렌드 분석가로 일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 자신의 삶과 일을 '나답게' 찾아가는 과정을 돕고 싶다.
인스타그램 @nonie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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