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플레이리스트 속 보랏빛 사운드에 관하여
내게 음악은 공감각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하고도 아름다운 매체였다. 10대 시절 문학시간에 활자로 배운 '공감각적 심상'이니 '객관적 상관물'이니 하는 용어들은 뇌리에 스칠 뿐 좀처럼 마음에 담기지 않았다. 그러던 중 나는 Prince라는 뮤지션을 알게 되었고 내가 이어폰을 꽂았을 때 그의 목소리는 뭐랄까… 나에게로 와 한 자루의 보라색 우산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에게 꽃과 같은 그대가 있다면 내게는 비 오는 날 우산과 같은 Prince가 있는 것이다.
Prince의 대표곡 중 하나인 <Purple Rain>은 8분 40여 초의 대서사시와 같은 곡이다. 물기를 머금은 듯한 기타 사운드로 곡이 시작되면 보라색 수증기가 피어나는 무(無)의 세계로 영혼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라이브 공연장에서 처음 공개되며 즉석으로 녹음된 이 곡에는 절제와 과잉을 넘나드는 Prince의 가창과 The Revolution의 용솟음과 같은 연주, 긴장감이 깃든 현장의 공기마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야말로 밴드 사운드를 기조로 한 음악을 하는 뮤지션이 보여줄 수 있는 라이브의 정수가 아닐까?
<Purple Rain>의 킬링 포인트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리스너마다 다른 지점을 꼽을 것이다. 그만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요소가 많은 이 곡에 나는 망설임 없이 기타 리프가 이 곡의 '킬포'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ROCK&ROLL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음악을 듣다가 '와. 기타 솔로 미쳤다.'라는 감탄을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이 문장에 고개를 끄덕인다면 <Purple Rain>의 장엄한 기타 솔로와 아름다운 리프를 꼭 감상해보시길. 술 없이도 취할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당신에게도 찾아올 것이다.
I only wanted to see you laughing in the purple rain.
보랏빛을 이야기하며 이 뮤지션을 빼놓는다면 섭섭할 사람 여럿 될 것이다. 바로 그 이름도 '퍼플퍼플한' 자우림(紫雨林). 올해의 길고 긴 장마에 버팀목이 되어 준 자우림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락앤롤 키즈를 꿈꾸던 10대 시절의 나는 이어폰이 내 감각기관의 하나라도 되는 양 늘 귓구멍에 쑤셔 넣고 다녔다. 그렇게 알게 된 수많은 뮤지션들 중 하나였던 자우림의 음악은 사실 친구들의 노래방 18번에 지나지 않았더랬다. 다들 마음속으로 한 번쯤은 신도림역 안에서 스트립쇼를 해봤으리라 믿기 때문에 여전히 누군가의 굳건한 18번을 차지하고 있을 자우림 불후의 명곡 리스트는 굳이 늘어놓지 않겠다.
나는 지극히 사사로운 이유로 그들의 음악을 마음 깊숙이 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연애였다. 무시로 감정이 요동치던 고등학생 때 만난 그 아이는 자우림을 미치도록 좋아했다. 아무리 견고한 취향의 요새를 만들어도 어떤 사람은 광선처럼 내 마음속을 뚫고 들어와 모든 걸 허물어버릴 수도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 애는 예쁜 목소리로 <욕>, <김가만세>, <악몽>과 같은 농도 짙은 음악부터 <연인> 시리즈, <#1>, <위로>와 같은 아름다운 허무가 담긴 음악까지 들려주고는 했다.
자우림의 히트송은 대개 신나는 노래들이지만 막상 그들의 앨범을 조금만 파고들면 낮은 BPM에 느리게 진동하는 김진만의 베이스, 정교한 춤을 추는 이선규의 기타 선율, 그리고 가차없는 김윤아의 노랫말들을 만나볼 수 있다. 히트송의 가사들도 하나씩 뜯어보면 이게 마냥 신남을 노래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느끼기도 한다. 자우림의 음악으로는 화끈한 희로애락의 회전목마를 탈 수 있는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과거의 연인 덕에 자우림 좀 들어본 나는 그들의 디스코그라피를 어느 정도 머릿속에 꿰고 있다. 성인이 되어 경제력이 생긴 이후로는 그들의 공연도 종종 보러 다녔더랬다. 메이저와 마이너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들에게 빨강과 파랑이 만난 보랏빛의 그 이름이 누구보다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직업으로서 음악인의 생태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9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밴드 음악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싶다. 다가오는 새 앨범도 열렬히 응원하고 있다. (사랑해요 김윤아. 당신 없인 못살아!)
TMI로… 나의 변치 않는 최애곡은 <샤이닝>이지만, 라이브로 꼭 들어보고 싶은 곡은 <템페스트>이다.
길을 잃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에도 단 한 번도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
2020년 9월
공연장이 그리운 K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