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 중요한 단어는 '슥슥'이다. 한국에서 영어를 배운 사람이 휴대폰으로 뉴스 기사를 대각선으로 슥슥 읽는 것처럼 영어 원서를 빠르게 읽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먼저 3년 전 나의 영어 수준과 지금까지 받았던 영어 사교육에 대해 솔직하게 밝혀보자면,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때까진 영어학원에서 놀면서 배우는 영어 교육을 받았고 고등학생 땐 한 달짜리 영국 어학연수를 가 본 적이 있으며 대학생이 된 후엔 종로의 여러 영어학원을 통해 단기간에 고득점 할 수 있는 시험 스킬을 배웠다. 한 달짜리 어학연수에선 같이 갔던 한국친구들과 주로 지냈기 때문에 영어는 매우 적게 사용했고, 토익 시험 공부할 땐 고득점을 받는 기술에 집중했기 때문에 진짜 영어를 공부했다고 보긴 어렵다.
주변에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쉽게 읽었다는 해리포터와 같은 원서는 읽다 포기했고,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쉽게 받는다는 오픽 AL 등급을 나는 여러 번 응시해서 겨우 받았다. 주변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의 영어 실력이 낮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미국 로스쿨의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을 따라가기엔 그리고 미국 변호사 시험을 보기엔 나의 영어실력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즉, 나는 영어로 된 문장을 물 흐르듯이 읽기는 어려웠고 내 생각을 영어로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미국 로스쿨을 다니고 미국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영어 원서를, 미국 판례를 대각선으로 슥슥 읽게 되기까지 그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영어 공부를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로 나눌 필요는 없지만,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이 글에선 듣기, 읽기와 쓰기에 대해 나누어서 기록한다.
듣기
영어만으로도 어려운데 영어로 하는 법 공부란 얼마나 어려울까. 하지만 일에 치여 그런 걱정 따위 할 시간과 영어 공부를 미리 할 시간 없이 바로 미국법 수업에 내던져졌다. 한국 대학원에선 영문 자료로 공부하더라도 한국어로 수업하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미국 교수님의 수업이 문제였다. 미국법 학점을 빠른 시간 내에 취득하고자 대학원 여름 방학 때 미국 데이튼 로스쿨의 비학위 과정을 수강했다. 첫날엔 미국 로스쿨 교수님이 헌법을 영어로 4시간 동안 강의하시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재밌었다. 하지만 교수님의 열정적인 미국 헌법 강의를 모두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수업시간에 놓친 부분에 대해서는 표시해 두었다가 다음날 출근길에 녹화된 강의를 다시 들으며 내용을 파악했다. 다시 들어도 들리지 않으면 0.8배속을 해서 들었고 알아들을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씩 들었다. 출근할 때마다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않았던 것, 항상 한글자막을 없애지 않고 미국 드라마를 보았던 것, 그동안 진짜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남들처럼 출근길엔 쉬고 싶었다. 그러나 전 날 수업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날 수업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고 결국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주말에도 쉬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직장인 겸 학생은 출근시간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동안 거의 매일(평일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4시간씩, 토요일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강제로 영어에 노출되다 보니 마지막 과목 땐 교수님이 진도 나가야 한다고 속도가 빨라졌음에도 어느 정도 내용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2020년 여름 동안의 혹독했던 수업이 끝나고 어느 출근길에 영어 팟캐스트 "Women at Work"의 한 에피소드를 들은 적이 있다. 예전엔 들리지 않아 스크립트를 보면서 듣기도 했던 팟캐스트였는데 그날은 진행자의 영어 대화가 또렷하게 들렸다. 어려운 미국법 얘기가 아니니까 심지어 더 쉽게 들리기까지 했다. 정말 미친 듯이 노력하면 늘긴 하는구나 싶었다.
읽기와 쓰기 1
어찌어찌 비학위과정을 끝내고 가을에 유콘 로스쿨 과정의 첫 번째 수업을 듣게 되었다. 과목명은 Legal Research & Writing. 미국 판례를 찾고 읽는 방법과 영어로 에세이를 쓰는 방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이제 겨우 듣기가 된다고 생각했더니 읽기와 쓰기 훈련이 시작되었다. 법보다는 영어의 장벽이 훨씬 높아서 로스쿨 수업이 아니라 영어 수업을 듣는 느낌이었다.
한국 판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미국 판례도 마찬가지였다. 왜 판사님들은 간단하게 써도 될 문장을 어렵게 쓰시는 것인지. 심지어 미국 판사님들은 비유법도 종종 사용하시고 햄릿이나 맥베스의 문장을 인용하시기도 한다. 그 판사님이 셰익스피어의 팬이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모르는 단어를 하나하나씩 찾아가며 판례를 읽으니 판례 하나 읽는데 몇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머릿속엔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 판례였으면 이미 다 읽었는데.
처음 에세이 과제를 할 땐 며칠이 걸렸다. 판례를 찾고 한참 읽고 생각하고, 네이버 사전에서 영어 단어를 찾고 쓰고 고치고. 한국어로는 훨씬 유려한 표현을, 더 설득력 있는 표현을 쓸 수 있는데 나의 에세이는 너무나 심플했다. 한국어를 영어로 변환하는 작업이 들어가니 글이 짧아도 시간은 오래 걸렸다. 그래도 좋은 학점을 취득해야 했으므로 판례를 지칠 때까지 읽고 꾸준히 썼다. 교수님이 쓰신 샘플을 보면서 문장을 따라 썼고 회사에서 일하면서 본 외국 본사 동료들의 이메일 문장을 따라 썼다. Westlaw(미국 판례 검색 사이트)에서 어느 판례를 읽다가 타고 들어가서 관련된 다른 판례를 읽는 과정을 계속 반복했더니 하루가 훌쩍 지나가기도 했다. 학기 내내 읽고 쓰다 보니 영어를 읽고 쓰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아직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래도 로스쿨의 Legal Research & Writing 수업이 미국 변호사 시험보다 다행인 점은 하나 있었다. 과도한 시간제한 없음. 교수님이 지금부터 몇 시간 안에 판례 읽고 에세이 빨리 써서 제출하세요라고는 안 하셨으니까. 물론 일반적인 미국 로스쿨 수업에서의 시험 시간은 예외로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