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 속에서 빛을 발견한다는 것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Silver lining playbook

by 마나스타나스

Humanity is just nasty and there's no silver lining.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티파니는 인간에 대한 사랑 따위는 구질구질한 것이고, 구름 가장자리에 희망 같은 건 없다고 소리친다.


전작들을 말아먹었던 데이빗 오러셀은 이 영화로 감독상, 작품상, 남녀주연·조연상, 각본상, 편집상 등 아카데미 주요 8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고, 제니퍼 로렌스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데이빗 오러셀에게는 이 영화가 말 그대로 진짜 실버라이닝이었을 것이다.


무려 13년이 지나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그 당시 느꼈던 아주 강렬한 인상- 굉장히 이상한 영화인데 굉장히 웃기네?-이 다시 떠올랐다. 어둠의 루트를 통해 소장하고 있었으면서도 이제야 다시 보다니, 사실 나야말로 정말 강렬하게 이상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나는 이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13년 동안 꽤 자주 떠올렸다. 실버라이닝이라.....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실낱 같은 빛이 비쳐오는 순간마다 이 영화를 생각하곤 했다. 마치 내 삶에도 그 빛이 비쳐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이렇게 말하면 마치 내가 불행한 삶을 살아온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아니지, 그런 삶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돌이켜보면 우울하고 절망적이었던 날들이 그렇게 엉망진창만은 아니었다.


실버라이닝- 구름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가느다란 빛은 누구에게나 설렘과 희망을 주는 건 사실이다.


유쾌하게 잘생긴 브래들리 쿠퍼는 똘끼 충만하면서도 멀쩡한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조합의 인물을 자연스럽게 소화해 냈다. 다만 상대역으로 나온 제니퍼 로렌스가 (이제 막 스무 살이 지난!!!) 워낙 기가 막히게 티파니를 연기하는 바람에 조금 덜 돋보였을 뿐이다.


주인공 둘을 얘기했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놀랍도록 인상적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좋아한다.) 정상인 사람이 없어..... 사실 그 누구도 정상은 아니다. 목록으로 작성하기 불가능한 수만 가지 기준을 사람들은 머릿속에 세워두고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려 한다. 그거 자체가 이미 비정상이거늘.


데이빗 오러셀은 우리 모두는 비정상임을, 아니지, 우리 모두는 어딘가 나사가 여러 개 또는 수십 개 빠져있어서 엉망진창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하늘을 가득 덮은 저 먹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밝은 빛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그들과 함께 행복한 삶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 생각만큼 어려운 일이 아님을 전한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막 눈물이 난다. 너무 감동적인 영화야.


아내의 불륜을 목격한 뒤 분노조절 장애를 갖게 된 팻(패트릭).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티파니.


둘은 자신의 슬픔과 분노의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다. 잊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놓지 못했다는 것도 잘 안다. 언젠가는 과거로 흘려보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안다. 다만, 그게 쉽지 않을 뿐이다.


쓰레기봉지를 뒤집어쓰고 더 많은 땀을 내려고 뛰던 팻, 직장 동료들과의 섹스로 슬픔을 지우고자 한 티파니. 둘 다 나름의 방식으로 슬픔을 벗어나려 했다. 팻은 뛰고 또 뛰며 머릿속의 트라우마를 지우려 하고, 티파니는 남편을 잃은 공허를 타인과의 관계로 채우려 한다. 각자, 혼자서.


그때 티파니가 팻에게 손을 내민다.
우리 같이 댄스 경연대회 나가요. 그러면 내가 당신의 편지를 니키(팻의 전부 인)에게 전해줄게요.
팻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둘은 매일 같이 춤 연습을 한다.


팻은 티파니가 더 미쳤다고 생각하고, 티파니는 팻이 정신병자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서로가 슬픔을 견디는 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티파니는 팻을 처음 보자마자 좋아하게 된다. (제니퍼 로렌스가 분한 티파니가 팻에게 반하는 순간의 미묘한 그 눈빛 연기는 정말 대단하다.) 팻도 알고 있었다. 티파니가 자신을 좋아하게 되었음을. 하지만 팻은 여전히 그 순간- 모든 게 무너지기 직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때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화가 나고, 슬프고, 계속 뛰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팻은 깨닫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슬픔을 견디기 위해 난잡한 길을 선택했지만, 그 안에 누구보다 진심이 있었던 티파니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이 먹으니 눈물만 많아져......)


앞서 말했듯 "정상"적인 캐릭터를 찾아볼 수 없는 이 영화에는 끝내주게 웃기는 팻의 아빠가 있다. 아빠라 표현한 이유는 팻이 극 중 내내 "Dad"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철딱서니 아들 팻. 근데 알고 보니 팻의 아버지도 만만치 않다. 레스토랑 투자금을 야구 내기에 몽땅 걸고, 손수건을 손에 꼭 쥐고 있어야 팀이 이긴다고 믿으며, 더 나아가 아들 팻 옆에서 같이 야구를 봐야만 팀이 승리한다고 믿는다 - 하지만, 그게 상처받은 아들을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물론, 야구를 향한 그의 진심임에도 틀림없다.


아버지는 댄스 경연대회를 마치고 도망치듯 달아난 티파니를 찾는 팻에게 말한다.

Let me tell you, I know you don't want to listen to your father, I didn't listen to mine, and I am telling you you gotta pay attention this time. When life reaches out at a moment like this it's a sin if you don't reach back, I'm telling you its a sin if you don't reach back! It'll haunt you the rest of your days like a curse. You're facing a big challenge in your life right now at this very moment, right here. That girl loves you she really really loves you. I don't know if Nicki ever did, but she sure as shit doesn't right now. So don't fuck this up.
내 얘기 듣고 싶지 않은 건 안다만, 이건 꼭 좀 말해야겠다. 인생에서 지금과 같은 순간이 벌어질 때, 만일 네가 이 순간을 잡지 않는다면 그거야 말로 죄짓는 거야. 그리고 그게 널 평생 저주하며 따라다닐 거라고. 넌 지금 일생일대의 순간에 와 있다고. 저 친구는 널 정말로 사랑하고 있어, 니키가 그렇게 했었는지는 난 모르겠다만 티파니가 널 죽도록 사랑한다는 건 확실해. 그러니까 이 기회를 망치지 마.

미신마니아의 자식 사랑.


그렇게 팻은 티파니를 쫓아 나가고, 정신병자다운 고백을 한다.

The only way you can beat my crazy was by doing something crazy yourself. Thank you. I love you. I knew it the minute I met you. I'm sorry it took so long for me to catch up.
내 광기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똑같이 미친 짓을 하는 것뿐이었죠. 고마워요. 사랑해요. 사실 난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걸 인정할 때까지 오래 걸려서 미안해요.


Humanity is just nasty and there's no silver lining이라고 소리 지르던 티파니는 팻에게서 그 실낱 같은 빛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갈 길 없는 슬픔을 함께 나누어 들고 함께 나아가 줄 단 한 사람.


코미디 영화를 가장한 로맨스 영화인지, 로맨스를 가장한 코미디인지 불분명한 이 영화를 로맨스 코미디라고 부르면 큰 실례일 것 같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내게, 그냥 웃긴 영화다. 2시간 동안 계속 웃었다. 안 웃을 수가 없었거든.


+ 데이빗 오러셀의 다른 영화들도 봤다. 조이와 허슬. 역시 허공에 약 0.3센티 정도 둥둥 떠다니는 이들의 갈길 찾아가는 내용을 다룬다. 이토록 다양한 소재로 하나의 방향을 찾아가는 것도 대단한 재능이다.


+ 나도 요즘 허공에서 약 1센티 정도 떠 있다. 그래서 정신이 없다. 그 와중에 Siliver lining playbook이 떠올라 다시 보게 된 건 도움이 되었다. 누군가의 진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길잡이가 되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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