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 절망도 그저 나의 몫일 뿐

Hamnet, Chloe Zhao

by 마나스타나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견디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인가,
아니면 고난의 바다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워 끝장내는 것이 더 고귀한 일인가?
죽는 것은 그저 잠드는 것뿐.
잠듦으로써 마음의 고통과 육체가 물려받은 수만 가지 고뇌가 끝난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간절히 바라는 바가 아니겠는가.
죽는 것, 잠드는 것. 잠든다면 꿈을 꾸겠지.
아, 바로 그것이 걸림돌이로다.
이 세상의 번뇌를 다 떨쳐버리고 죽음의 잠에 빠졌을 때,
그때 어떤 꿈이 찾아올지 생각하면 망설여질 수밖에.
그 망설임이 비참한 인생을 그토록 길게 끌고 가게 하는구나.

클로에 자오 감독의 영화 Hamnet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탄생한 배경을 짚는다.


사생활에 대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에게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들, Hamnet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짧은 한 줄로 남아 있는 이 사실로부터 시작한 Hamnet 원작 소설은 절제된 색채와 소리를 입고 영화로 재생산되어 마음속 깊이 울림을 남기는 허구의 진실을 전한다.


몇 주 전, 단조로운 선율이 겹쳐진 잔잔한 음악을 배경 삼은 햄넷의 한 장면을 한참 동안 보았다. 영화를 보기도 전이었지만 나는 울고 싶었고, 울었다. 그렇게 이 영화는 꼭 영화관에서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영화관에는 채 10명도 안 되는 관객들이 있었다. 나는 맨 뒷자리에 앉았다. 슬픔 비슷하지만, 구체적인 감정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눈물은 쉽게 마르지 않았다.


영화는 아녜스가 고요한 숲 속, 나무 품에 안겨 잠들었다가 깨어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때의 바람소리가 여전히 귀에 들리는 듯하다. 사실 바람 소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이 영화는 '바람 소리'의 기억이다. 정확하게는 바람에 나무가 스치는 소리.


그 소리를 따라 아녜스와 윌이 만나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며, 절망 속에 침잠하며, 다시 웃는다.


이 영화는 페르메이르나 카라바초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빛과 그림자 사이로 흐르는 세밀한 표정과 움직임들. 바람 소리와 절제된 선율을 따라가는 한 가정의 서사는 정적과 함께 미분되어 그다음으로 이어진다. 그 정적의 순간들은 이 시대극을 마치 현재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 여백은 일종의 공간이 되어, 영화 속에 꾹꾹 눌러 담긴 한 가정의 슬픔 위로, 오늘의 나를, 나의 슬픔을 비추게 한다.


미분된 한 가정의 절망은, 그 공간에서 관객의 현재와 맞물리며 하나의 거대한 공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영화는 절망에 공감하라고, 또는 무조건 슬퍼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절망도, 슬픔도 오로지 개인의 몫이다. 영화 속 정적의 순간들은 철저하게 관객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 절망과 슬픔을 보장한다. 극 중 아녜스가 절망하고 또 절망했듯이, 윌이 그 끝을 알 수 없게 슬퍼했듯이- 그들과 스크린 너머에서 함께하는 이들 역시 자신의 무게만큼 절망하고 슬퍼할 수 있다.


마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허무를 마주하게 하는 로스코의 회화 앞에 선 관객처럼, 이 영화는 인물의 슬픔과 절망을 구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 자신의 슬픔과 절망을 온전히 대면하게 한다.


한편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김은국의 <순교자>를 생각했다.

<순교자>를 보고 남긴 감상은 다음과 같다.

한없이 하얀 3차원의 공간에서 인물들이 살아나며 말을 한다. 때문에 같기도 하며 다르기도 한 그들 각자가 좇는 진실의 실체가 더욱 선명하게, 그래서 더욱 괴롭게 다가온다.


왜 이 소설이 겹쳐 보였을까.

김은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한국인으로서, 미국인이 되어 <순교자>를 썼다.

클로에 자오는 중국에서 성장한 중국인으로서, 미국과 영국의 정서를 담은 영화를 쓰고 연출했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문화적 괴리 그 언저리에 머무는가 싶으면서도, 이방인이기 때문에 그 간극을 초월해 보편적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

내가 좋아하여 자주 드는 비유처럼, 위아래로만 움직이며 제자리를 맴도는 나선형의 궤적 같지만, 지나고 나니 깊이가 더해져 인간이기에 지니는 보편적 감정에 다다를 수 있는 것- 이방인으로서 예술을 이뤄낸 그들이다.


+ 아녜스는 Agnes로 가톨릭에서는 신의 '어린양'으로 상징된다.

아녜스로 분한 Jessie Buckly가 스크린 밖으로 시선을 던질 때는 마치 그녀와 함께 있는 듯했다. 뚫어지라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


+ 극 중 윌(셰익스피어)은 부두의 끝에 홀로 서서, 발밑으로 일렁이는 깊은 바다를 바라보며 나직이 읊조린다 -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삶이 안겨주는 수모와 수치, 그 모든 고통을 짊어진 채 끝이 보이지 않는 생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단검 한 자루로 영원한 잠을 청해 잔인한 현실로부터 도망칠 것인가. 하지만 죽음이 그저 평온한 안식이 아니라, 잠든 꿈 속에서조차 알 수 없는 또 다른 고통과 마주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저 이 고단한 삶을 버텨내야만 하는가.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어느 쪽도 감히 선택하지 못한 채, 그저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바다 깊은 곳을 헤아리며 혼잣말을 할 뿐이다.


셰익스피어로 분한 Paul Mescal은 고전 그리스 조각상 같다.


+ 음악은 막스 리히터가 담당했다. Arrival (한국 제목 컨택트) 영화 음악도 담당했던 분이었다. 그 때도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혹시나 찾아보니 같은 분이었다.

막스 리히터는 사카모토 류이치와도 교류가 있었다. 무색의 세계를 향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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