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롤 리드, 빌리 와일더, 알프레드 히치콕
그레이엄 그린은 첩보 활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스터리하고 스릴 있는 소설을 써온 영국 작가다. 그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제3의 사나이>를 한 달 전쯤 읽은 것 같다.
말 그대로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소설 전체를 지배한다. 그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스릴로 이어진다.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다음 장면이 어떻게 이어질지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감돈다. 단순히 조마조마한 긴장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감각에서 비롯되는 더 근원적인 불안이다. 그 깊은 층위의 미스터리함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그 후 여느 때처럼 인스타그램을 훑다가 영화 The Third Man을 소개하는 한 피드를 보게 되었다. 어라, 설마 이 영화가 내가 읽은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한 걸까. 그렇다. 1949년 작, 캐롤 리드 감독의 The Third Man은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며, 그 내용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소설보다 한결 유쾌하고 느긋하다. 폐허가 된 빈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인물들의 태도에는 어딘가 건조한 농담과 여백이 남아 있다.
The Third Man은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환자들을 상대로 가짜 페니실린을 유통한 범죄자를 둘러싼 스릴러다. 그럼에도 영화에는 이상하리만큼 ‘태연함’이 흐른다. 다들 급하지가 않다. 범죄자도, 그를 쫓는 사람도, 그를 사랑한 사람도. 죽음과 배신, 전후의 혼란이 배경임에도 인물들의 태도는 건조하고 느긋하다.
소설의 불안함을 영화의 태연함으로 이끄는 데에는 음악의 힘이 컸다. 캐롤 리드는 분명 심각한 상황임이 틀림없는 장면 위에 경쾌한 테마를 반복적으로 얹는다. 밝고 리듬감 있는 테마는 불안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묘하게 비켜간다. 덕분에 관객은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한 발 떨어져 바라보게 된다. 그 경쾌한 반복은 옛 영화 특유의, 때로는 뜬금없이 넘어가는 전개를 자연스럽게 이어준다. 심각한 이야기임에도 영화가 무겁게 가라앉지 않는 이유이다.
+ The Third Man에는 오손 웰즈가 나온다. 그 유명한 오손 웰즈. 미남 배우가 넘쳐나던 시절에 미남이 아님에도 명배우와 명감독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은 그 오손 웰즈.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명성은 거저 얻게 되는 것이 아님을.
비엔나의 한 골목에서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표정은 영화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전쟁이 남긴 구멍들을 오히려 범죄의 정당성을, 그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한 범죄자가 어둠 속에서 그를 드러내는 장면이다. 희미하게 냉소적이면서도 연민 어린 미소를 띤 뻔뻔하고 자신감 넘치는 등장.
The Third Man은 왓차에서 보았다. 왓차에는 1940년대와 50년대 영화들을 잘 모아놔서 자주 찾게 된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검찰 측의 증인>을 보게 되었다.
<검찰 측의 증인>은 원제 Witness for the Prosecution이다. Agatha Christie의 단편이 원작이며 영화는 빌리 와일더가 감독했다. 고등학생 때였던가, 집 책장에 꽂혀 있던 해문출판사의 <검찰 측의 증인>을 읽은 기억이 있다. 다른 단편들의 내용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단편집의 제목이자 첫 번째 단편이었던 <검찰 측의 증인>만큼은 오래도록 떠올랐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내뱉는 한 마디가 그만큼 강렬했다.
한 남자가 자신을 도와준 노부인을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다. 그의 유일한 알리바이는 아내의 증언뿐이다. 그 ‘증언’이 소설과 영화를 끌고 가는 단 하나의 장치다. 그러나 원작이든 영화든, 그 유일함은 결코 진부하거나 지루하게 소비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제한된 장치를 끝까지 긴장으로 유지하는 힘에서, 원작자와 감독의 설계 능력, 그 절대적인 재능이 드러난다.
The Third Man에서 느꼈던 태연하고 느긋한 감각은 이 영화에서도 발견된다. 살인과 재판이라는 극단적으로 심각한 상황임에도 인물들은 참으로 여유롭다. 다들 급해 보이지 않는다. 긴박한 순간에도 한 박자 물러서 있는 듯한 태도. 그 여유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참으로 단단하다. 그래서 문득, 저 시대—1950년대—에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낭만적이었을 거야.
영화는 원작과 달리 곳곳에 유머를 배치함으로써 원작의 건조하고 비교적 단순한 플롯을 훨씬 풍성한 구조로 만든다. 그 덕분에 ‘살인’과 ‘재판’, ‘배신’과 ‘복수’라는 주제가 무거운 쪽으로만 기울지 않는다.
+ Witness for the prosecution에서 극 중 아내를 연기한 마를렌느 디트리히는 출연 분량이 압도적으로 많지 않음에도, 화면에 등장하는 순간 그 존재감이 엄청나다. 이 정도로 끝나는가 싶을 때, 그녀의 존재감이 만들어내는 반전은(원작에는 없음에도) 미국식 소프오페라나 한국식 막장드라마처럼 보이면서도 너무나 극적이어서 오히려 그리스 고전 비극에 가까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연이어 <다이얼 M을 돌려라> Dial M for Murder를 보았다. Watcha에는 무엇을 봐야 할지 고민해야 할 만큼 Alfred Hitchcock의 작품들이 올라와 있어,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제목을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추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관객은 범인을 추측할 필요가 없다.
살인을 계획하는 자,
살인을 실행하는 자,
살인의 대상이 되는 자,
살인의 계획과 동기.
그 모든 것이 영화 초반에 친절하게 제시된다. 히치콕은 그냥 보여준다. 인생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듯 계획 역시 설계자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살인은 예정된 대로 실행되었으나, 그 결과는 모든 것을 계산했다고 믿었던 자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다.
영화의 긴장은 ‘누가 범인인가’가 아니라 ‘이 계획이 어디서 어긋날 것인가’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결말은 서양식 권선징악의 구조를 따른다. 다만 그것은 요란하지 않다. 그저 gentle할 뿐.
Dial M for Murder는 대단히 품위 있게, 매우 재미있다. 별다른 장치 없이 긴장과 재미의 균형을 유지하며 관객의 집중을 끝까지 붙든다. 여기서 말하는 ‘장치’란 과한 액션이나 환상적인 풍경, 도시의 생동감, 혹은 화려한 CG 같은 것들이다. 이 영화에는 그런 과시가 없다. 대신 계산된 대사와 구조가 있다.
히치콕은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배경은 거의 한 아파트 내부가 전부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또 말한다. 정말 말이 많다 싶을 정도로 대화를 이어간다. 그런데도 지루하지 않다. 앞서 이야기한 두 영화처럼, 이 영화에서도 누구 하나 격렬하게 흥분하지 않는다. 대화는 단조로울 만큼 품위 있고 차분하다. 살인을 다룬 영화가 맞나 싶을 정도다.
이 영화를 보며 감탄했던 지점은, 설계자의 의도에서 한참 벗어난 계획이 ‘대화’를 통해 다시 재구성되는 순간이었다. 사건은 물리적 증거가 아니라 대화의 흐름 속에서 재배열된다. 그 과정은 계획의 설계자를 서서히 긴장 속으로 몰아넣는 동시에, 관객의 집중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린다. 과연 그는 자신의 의도와 계획을 끝까지 들키지 않을 것인가. 범죄를 다시 조립해 진짜 범인을 몰아붙이는 영화의 말미에 이르면, 왜 사람들이 히치콕을 히치콕이라 부르는지 납득하게 된다.
+ 그레이스 켈리는...... 아름답습니다.
세 편의 영화를 보며 한 가지가 계속 떠올랐다 - 태연함.
영국인들, 특히 그 시절의 영국인들은 묘하게 태연하다. 2차 세계대전 중에도 폭격 속에서 티타임을 지키던 사람들, 덩케르크 해변에서 후송선을 기다리며 폭격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만 하는 군인들의 모습에 독일군들도 황당했다는 후문이다. 공포 한가운데에서도 일상의 형식을 유지하려는 그 느긋함이, 어쩌면 그들의 생존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 시절의 영화에는 우아함과 품위가 남아 있다. 격렬하게 흥분하지 않고, 냉소를 섞어 농담을 건네며, 결정적인 순간에도 한 박자 물러서는 것. 사건을 저지른 사람도, 해결하는 사람도, 바라보는 사람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 그래야만 버텨낼 수 있었던, 살아남을 수 있었던 시절이다. 전쟁의 시대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