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빠져나오지 못하는 욕망의 풍경, 점입가경

코엔 형제의 영화들 - 파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외

by 마나스타나스

점입가경 漸入佳境 - 본래는 상황이 점점 더 아름답고 흥미로워진다는 뜻의 사자성어였지만,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점점 더 흥미롭게 나빠지는 국면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는 점이야말로 흥미롭다.


이 말의 기원은 중국 동진 시대의 화가 고개지에 있다. 그는 “먹으면 먹을수록 단맛이 강해지기 때문에” 사탕수수의 단맛이 덜한 끝단부터 먹었다고 한다. 그 일화에서 비롯된 사자성어가 바로 점입가경이다. 이 의미는 코엔 형제의 영화를 떠올리며 음미해 볼 수 있다. 다만, 방향은 정반대다.


코엔 형제의 영화를 보며 머릿속을 떠돌기만 하던 그 사자성어는, 반나절이 지나서야 생각이 났다 - 점입가경.


<파고>는 내가 처음으로 보게 된 코엔 형제 (또는 코언)의 영화이다. 얼핏 봐도 이상하게 웃길 것 같은 <애리조나 유괴사건> 같은 영화도 유명하지만 난 파고를 먼저 보게 되었다.


때는 미성년이었던 시절. 저녁 시간이었고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한 장면이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나무로 듬성듬성 가려진 하얀 눈밭에 놓인 분쇄기 앞에서 내복 바람의 한 남자가 무언가를 욱여넣고 있었다. 분쇄기 반대편에서는 그 무언가가 갈려 들어가며 눈밭에 붉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카메라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분쇄기 속으로 들어가다 말은 사람의 발목이 보였다. 그리고 만삭의 여자 경찰이 내복 차림의 남자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미성년자에게 충분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어른되서 꼭 봐야지”라는 단순하고 분명한 결심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파고는 미국 노스다코타 주의 도시 이름이다. Fargo - 실제로는 노스다코타에서 촬영된 것은 아니고 다른 주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미국 북부 지역에 얼마나 많은 눈이 내리는지 체감하게 만드는 데에는 충분하다.


눈이 쌓이고 또 쌓이는 그 동네에서, 자신의 사업을 해 보고 싶었던 평범한 가장은 자금 마련을 위해 범죄를 계획한다. 계획은 뻔할 정도로 하찮고, 엮이게 되는 인물들도 뻔하게 하찮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사태는 예측불가로 위험해지며 "점입가경"으로 치닫는다.


노스다코타 특유의 사투리는, 계획을 되돌리려 하면 할수록 더 통제 불능으로 흘러가는 이 하찮고도 위험한 범죄를 묘하게 희석시키는 역할을 한다. Yeah가 아니라 Yah. Yah가 반복된다. 야, 야, 야! 야~. 핏빛 살점으로 물든 눈밭과 함께 오래도록 머리에 남는 소리다.


영화의 끝에서 경찰서장 마지로 분한 프랜시스 맥도먼드는 범인을 차에 태운 채 중얼거린다 -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런 일을 벌이다니. 그리고 그녀는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간다. 낚시를 좋아하는 남편이 있고, 따뜻한 침대에 누워 TV를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아늑한 삶.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인” 범죄자들로부터 잠시 멀어지는 삶이다.


무표정하게 읊조리는 마지를 보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보안관으로 등장했던 토미 리 존스를 떠올렸다.


이 영화도 코엔 형제의 작품이다. 보기 드물게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바로 그 영화. 핀터레스트 미녀들의 단발머리를 추구미로 삼았던 많은 이들에게, 현실은 안톤 쉬거의 단발머리라는 현실을 깨닫게 한 바로 그 영화.


이 영화를 생각하면 늘 한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야, 이 영화에는 음악이 없어, 그게 정말 대단한 거라니까."

왜 그게 대단한지는 아직도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음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주 극도로 절제되어 사용되었을 뿐이다.


아주 사소한 일말의 연민이 인간의 욕망과 결합하며 불행으로 치닫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파고>와 맥락을 같이 한다. 걷잡을 수 없이 치달아 가는 과정.


내 것이 아닌 것을 욕심낸 자

범죄로 취한 것을 지키기 위해 더 큰 범죄를 계획한 자

더 큰 범죄를 실현하고, 자신만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앞선 자들을 제거하는 자

욕심과 계획과 제거, 그 어느 것에도 가담하지 않았지만 '부차적 피해'를 입은 자

이 모든 흔적을 따라가며 추적하고, 끝내 결말에 도달하지만 무력함 속에서 그저 흘러가게 두는 자


인도 신화 마하바라타에는 불타는 수레가 등장한다. 전쟁이 끝난 뒤, 크리슈나가 자신이 몰던 전차에서 내리자마자 그 전차는 불에 휩싸여 재로 변한다. 또 다른 신화에서는 전쟁의 여신 시바가 불타는 수레바퀴 한가운데서 춤을 춘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인간의 삶이 소멸해 가는 과정은 막을 수가 없다. 전쟁을 이기게 해 준 수레는 불타 없어지고, 전쟁의 여신은 불 속에서 춤을 춘다. 인간은 그 욕망과 욕심으로 타인 또는 자신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며 소멸해 간다.


안톤 쉬거의 목적 없는 폭력과 그에 맞서지 못하는 "무력함"


<번 애프터 리딩> Burn after reading

이 영화, 코미디인 줄 알았는데 코미디가 맞다. 꽤 센 블랙코미디. 사람이 막 죽어나가는, 그런 종류의 코미디.


채드로 분한 브래드 피트가 그렇게 죽을 줄은 몰랐지 뭐야.

린다로 분한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그 정도로 연기를 잘할 줄 몰랐지 뭐야.

오스본 콕스로 분한 존 말코비치가 그토록 그 역할에 잘 어울릴 줄 알았지 뭐야.


이 영화 또한 앞의 두 영화와 맥을 같이 한다. 평범한 인물들이 호기심과 욕심 때문에 일파만파 범죄에 휩쓸리고, 바로잡으려 하면 할수록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게 되는, 그런 맥락이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눈덩이처럼 커진 사태는 주인공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코엔 형제 작품이다. 그래서 결과는 어처구니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딱히 주인공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나사가 빠진 주인공인 듯 아닌 듯 한 사람들이 벌인 일들은 나름대로 그 조각이 맞춰지며 서로의 불행을 초래한다. 그렇게 엮이고, 그렇게 망가진다. 이래서 악순환, 선순환이 가능하구나 싶기도 하다.


코엔 형제는 넷플릭스 영화도 제작했다 - <카우보이의 노래> The ballade of Buster Scruggs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6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생각보다 재밌다. 그리고...... 허무하고 슬프다. 그게 코엔 형제의 시그니처라던데.


제목인 The ballade of Buster Scrugg는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노래를 부르며 묘기에 가까운 총질을 하는 지명수배자, 버스터 스크럭스.

"겨뤄볼 만한 사람을 찾아 당신에게까지 왔소" - 이렇게 자신을 소개한 검은 옷차림의 카우보이에게 총 한 방을 맞고 그와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며 하늘로 떠나간 버스터 스크럭스. 첫 번째 이야기가 이렇게 재밌다.


다섯 번째 에피소드였던 <낭패한 처자> The gal who got rattled는 매우 슬프다. 이제야 행복하게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았던 롱거바우 아가씨는...... 그럴 수 없었답니다 - Mr. Arthur walks back to the wagon train, unsure of what to say to Billy Knapp.


이 영화에 대해 찾아보던 중, 한 외국인이 '이 영화는 니힐리즘 적이야'라고 적은 글을 봤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허무하게 죽어나가는 장면들만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누군가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가고 또 나아가니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이 영화가 다른 코엔 형제의 영화와 다르다고 느낀 점은—내가 그들의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음악이 많다는 것이다. 노래가 많다. 밝고 흥겨운 컨트리풍 멜로디 위에 얹힌 가사들은, 무법의 시대였던 서부 개척기의 암울함을 오히려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카우보이의 노래>는 기존의 코엔 형제 영화들과 다르면서도, 색깔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코엔 형제의 영화는 점입가경이다.


사태는 언제나 사소한 욕심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들은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통제하려 할수록 통제 불능으로 흘러가고, 단순하게 만들려 할수록 사태는 점점 더 복잡하고 잔혹해진다. 이야기는 점입가경으로 치닫지만, 그 흥미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파국의 방향으로 축적된다. 코엔 형제의 영화에서 ‘가경’이란, 인간이 끝내 빠져나오지 못하는 욕망의 풍경이다.


+ 나는 프랜시스 맥도먼드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 영화는 꼭 보고 싶어진다. 미국 영화사에서 가장 위대한 배우 중 하나로 꼽히는 프랜시스 맥도먼드. 드드드 자로 끝나는 말은 숀 펜, 왜냐면 그는 현존하는 남배우 중 연기의 신이니까.


+ 그래도 여전히 <파고>의 그 장면은 강력하다. 너무나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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