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에서 적당한 거리감이 중요한 이유 9
옛날에는 사람을 참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과 매일 붙어 다녔고, 대학교 때는 동기들과 매일 술독에 빠져 살았다. 그렇게 놀았는데 지금도 주량이 약한 걸 보면, 확실히 술보다는 친구들이 좋아서 자리를 지켰던 것 같다. 군대 제대 후에는 선임들과 자주 만났으며, 회사 다닐 때도 동료들과 자주 만나 수다를 떨었다.
한 외국인 친구가 이런 나에게 '포모(FOMO)'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FOMO는 'Fear of Missing Out'의 약자로 '중요한 경험이나 기회를 놓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이 모인 걸 SNS로 봤을 때. 나도 뭔가 그 자리에 끼고 싶고. 안 불러준 것에 대한 서운함을 느낀다면 FOMO라고 했다. 그래서 여행, 모임, 파티, 최신 트렌드를 놓치는 것에 강한 불안감을 가지고. 가끔은 불필요한 소비를 하는 경향이 있단다. 딱 나다.
물론 지금도 약속이 적은 건 아니다. 근데 예전에 비해 많이 줄은 건 확실하다. 인간관계에서 실망? 글쎄.. 여러 이들이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뒤에서 험담을 하다가 들킨 적도 있고, 돈을 빌려줬다가 아직까지 못 받은 경우도 있다. 난 이만큼 상대방을 생각하는데, 그쪽이 그렇지 않다면 자연스레 실망감이 커진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예전처럼 사람을 쉽게 믿지 않게 되었다. 한때는 연락이 뜸해지는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고, 약속을 잡으며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지금은 그런 노력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애쓰지 않으면 흐려지는 관계라면, 그게 과연 진짜였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혼자가 되고 싶은 건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성향은 여전해서, 가끔은 예전처럼 북적이는 자리가 그리울 때도 있다. 다만, 이제는 무작정 자리를 채우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과 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중요해졌다.
요즘은 혼자 있는 시간이 점점 편해진다. 카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집에서 조용히 영화를 보는 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나를 부르는 자리가 없으면 불안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런 시간이 생기면 반갑다. 어쩌면 FOMO에서 JOMO(‘Joy of Missing Out’, 놓치는 것을 즐기는 태도)로 변해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가끔은 예전처럼 한밤중에 갑자기 불려 나가 맥주잔을 부딪치고, 목욕탕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별것 아닌 이야기에 웃음이 터지는 순간들이 그리워진다. 하지만 그건 추억으로 남겨두는 게 더 좋을지도. 적어도 지금의 나는, 꼭 끼어야 한다는 강박 없이도 충분히 괜찮으니까. 인간관계에서 적당한 거리감이 중요한 이유를 나름대로 정리해 봤다.
개인의 자율성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라지만 가끔은 혼자만의 시간도 필요하다. 관계에 너무 몰입하면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잃기 쉽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Edward Hall)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관계에서 물리적·심리적 거리는 개인의 영역을 보호하고 각자의 자유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불필요한 갈등 예방
가까운 관계는 사소한 문제도 갈등으로 번지기 쉽다. 거리감이 있으면 서로의 단점을 지나치게 들여다보지 않게 되고, 작은 다툼이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경제적 부담 완화
친밀한 관계는 종종 경제적 부담으로 이어진다. 선물, 모임 비용, 대소사 참석, 심지어 여기에 돈을 빌려주는 등 채무 관계까지 더해지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무례한 행동 방지
친하다고 말과 행동까지 격이 없어지는 이들이 종종 있다. ‘가까우니까 이해하겠지’라는 생각 때문이다. 적당한 거리감은 예의를 지키게 만든다.
권태 예방
거리감은 관계에 신선함을 더해준다. 무슨 말이냐고? 너무 가까우면 권태를 느끼기 쉽다. 거리감은 이러한 권태를 예방하며, 오랜 기간 관계를 지속할 수 있도록 돕는다.
상호 존중
아무리 친해도 계속 존댓말을 쓰다 보면 상대방의 경계선을 침범하지 않게 된다. 이는 서로의 사생활과 생각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게 만들며, 관계를 더 성숙하게 발전시킨다.
관계를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면 감정적인 판단에서 벗어나 관계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상대방의 행동이나 말을 더 냉철하게 이해하고, 오해를 줄이는 효과도 있다.
지나친 의존 방지
관계에 거리감이 생기면 상대방에게 과도하게 기대거나 의존하지 않게 된다. 이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능력을 키우며,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대치 조정
너무 가까운 관계에서는 상대방에게 과도한 기대를 품기 쉽다. 적당한 거리감은 이러한 기대를 현실적으로 조정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