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Mar 19. 2018

미투 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고?

미투 운동의 진보성에 대하여

미투 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실은 우려라기보다 방해에 가까운 목소리들이다. 이 목소리들의 실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성범죄의 가해자로 특정 정치 세력에 몸 담고 있는 몇몇 정치인과, 그와 친분 관계에 있던 문화계 인사들이 지목되고, 그 구체적 내용이 폭로의 형식으로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두고 누군가는 그 의도의 순수성을 의심했다. 고결해야 할 미투 운동이 특정 세력을 겨냥하여 정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주장이 뒤따랐다.


이런 주장은 매우 이상하다. 상식에 어긋나도 크게 어긋난다. 미투 운동 자체가 고도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이것이 또다시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미투 운동이 '고결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그 운동을 이끌어가는 여성들에게 요구되었던 전근대성의 산물이다. 도대체 그들이 생각하는 미투 운동의 '고결한' 본질이 무엇이길래, 이런 무리한 주장을 아무 거리낌도 부끄러움도 없이 할 수 있는 걸까.


분명한 사실은 우리 사회가 미투 운동으로 상징되는 진보성을 받아들일 역량을 제때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의 미투 운동이, 우리나라 사회 운동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한다. 암울했던 시절, 주권재민과 법치주의를 위해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다 흘려진 피의 역사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견고함을 더해가는 부조리한 사회의 벽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전과 다른 차원의 진보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를 변화시킬 동력 자체를 얻지 못한다. 물질적으로 충분히 풍요로워지고 정치적으로도 민주화된 시대에 무언가를 더 바꾸어내겠다는 세력의 진보성이 이전 세대의 그것만도 못하다면,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거나 동요할 사람들이 있겠는가. 오늘날 강한 힘으로 사회 곳곳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 미투 운동은, 필연적으로 과거의 여러 사회 운동보다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미투 운동이 불러일으킨 대중의 분노가, 피해자에 대한 조롱과 2차 가해가, 대립하는 목소리들이 만들어내는 폭발적 마찰음이, 미투 운동의 강한 진보성을 여지없이 증명한다.


과정은 이렇다. 누군가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린다. 많은 사람들이 지지와 연대의 목소리를 높인다. 다른 누군가는 이들을 조롱한다. 바보 같은 짓이라며 냉소를 보낸다. 이제 와서 딴소리한다고 그들 의도의 순수성에 흠집을 낸다. 하지만 아무도 미투 운동으로 대변되는 목소리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연대의 움직임은 점점 활발해진다. 예상치 못한 거센 저항에 기득권은 불안을 느낀다. 이런 경우에 기득권은 보통 철저한 무시와 침묵으이익을 취하지만, 더 이상 무시없을 만큼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났을 때는 적극적 조치로 약자의 입을 막으려 든다. 결국 이들이 공유하는 거대한 위기의식은 미투 운동에 대한 음해로 이어진다. 배후에서 미투 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며 우려 섞인 주장을 내뱉는다. 물론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지만 그들 입장에선 손해 볼 것 없는 장사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모든 과정이 미투 운동과 페미니즘의 강한 파급력을 증명한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앞으로 점점 더 강한 힘과 도덕적 권위를 갖추어 나갈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아니지만, 종국에는 (아마도 수년, 어쩌면 수개월 안에) 정치인들도 이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전 세대의 진보주의자들은 대부분 시간과 함께 바래지며 낡은 보수주의자가 된다. 그들이 이삼십 년 전에 외치던 진보주의는 이 땅에 실현된 지 오래다. 새로운 세상에서 그것은 더 이상 진보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보수적 사회의 기본 조건으로 기능한다. 예컨대 정치인들은 틈만 나면 민주주의가 몇십 년씩 퇴행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보아야 한다.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우리나라의 제도와 기관들은 매우 단단해서 어느 한두 집단의 의도로 망가뜨리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민주주의가 뒷걸음질했다는 말을 구호처럼 반복한다. 이는 그들의 진보성이 이삼십 년 전의 민주화 이데올로기에 매여있기 때문이고, 이제는 그것이 어떤 보수적 관성(또는 닳아빠진 레토릭)으로 굳어졌음을 의미한다. 그 이상의 가치를 담은 진보주의를 외치기에 그들은 너무 낡았으며, 또한 부패했다.


그 결과 그들은 미투 운동으로 대변되는 진보주의(혁명성)를 결코 따라잡지 못한다. 오늘날 페미니즘은 일찍이 존재했던 그 어떤 진보적 이념보다 우리 사회에 강한 설명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 진보성을 따라잡는 감각을 보여주는 주류 정치인은 아직 다. 정치인들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보성을 읽지 못하니,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 또한 미투 운동이 의미하는 진보주의를 제대로 읽지 못한다. '미투 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말도 안 되는 메시지가 무리 없이 통용되는 데에는 이런 안타까운 현실의 단면이 녹아있다. 기존의 정치문법에서 진보라 불리는 세력들마저도 미투 운동의 진보성에 비하면 매우 보수적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쉽게 말하면, 기존의 정치인들은 제 아무리 진보적 가치를 위해 헌신했던 인물일지라도, 여성이 동등한 주체가 되도록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여성 이슈에 관한 한 우리 사회의 보수/진보는 정책적으로 구별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 사소하게 여겨졌다.


이제부터 그런 소극적 진보주의는 눈에 띄게 도태될 것이다. 미투 운동의 적극적 진보주의가 기존의 모호한 진보개혁세력을 밀어낼 것이다. 정치인이란 기본적으로 시대와 여론의 요구에 응하는 존재일 뿐이므로, 진보세력으로 포지셔닝하여 살아남으려면 페미니즘을 남보다 앞서 익히는 것이 필수다. 정치인들이 페미니즘의 성난 파도 위에 올라타는 것은 시간문제다.


물론 아직도 젠더 기득권은 남성들에게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미투 운동의 거대한 흐름을 막으려 드는 그들의 언행에 끊임없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긴 싸움이 되겠지만, 결국 이 싸움의 승자는 명백하다. 한국의 페미니스트는 그들이 속한 사회보다 도덕적이고, 그들을 조롱하는 무리보다 진보적이다. 그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보다 커지기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

작가의 이전글 부끄러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