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리 Aug 17. 2018

공감능력이 부족한 아이

공감능력은 경험의 폭과 깊이에 좌우된다

공감은 일시적으로  벗어나 대상의 감정을 느끼는 행위를 뜻한다. 타인의 감정을 내 안으로 들여오면서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다. 공감의 대상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고, 기르는 개나 관엽식물일 수도 있고, 아끼는 자동차나 명품 백일 수도 있고, 길을 지나다 마주친 돌멩이일 수도 있다.


이런 공감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는 아이들이 있다. 타인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심술을 부리거나 키우는 고양이를 이유 없이 괴롭히거나 길가의 벌레를 일부러 밟아 죽이는 등 폭력적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심하면 선천적으로 공감능력이 결여된 것인지 여부를 의학적으로 확인하기도 하는데, 간혹 반사회적 인격장애 판정을 받는 경우도 있다. 이 글은 그런 경우(의학적으로 다루어야 할 증상이나 징후)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이 글의 목적은 아동기에 흔히 보이는 자기중심성과 그 오해에 관해 살펴보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공감 능력이 없어. 가끔 보면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고 자기 생각밖에 못하는 것 같아. 입장 바꿔서 생각해보면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야 되잖아. 우리 어릴 적엔 자기보다 약한 사람부터 말 못 하는 짐승까지 얼마나 조심해서 다뤘는데. 이제는 뭐든지 풍족하니 소중함도 모르고, 그만큼 감정도 삭막해지는 것 같아."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공감이 매우 고차원적인 인지활동이라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감수성의 영역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과 충분히 거리를 두는 이성적 노력이 있어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 과정을 자기 객관화라 부른다. 머릿속에서 나를 다른 사람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그 사람의 감정을 내 것처럼 소중히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수준 높은 인지능력을 요한다.


이런 인지활동영역이 충분히 활성화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은 자기중심적 성향이 두드러진다. 갓난아기는 타인의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다 가까운 가족부터 공감의 범위를 차례대로 늘려나간다. (아기들은 웃음과 울음을 통해 대부분의 욕구를 충족하는데, 이때 일어나는 감정의 전이를 통해 기초적 공감 능력을 학습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아기가 맺는 최초의 사회적 관계는 대부분 부모와의 가족관계이다. 알다시피 이 관계에서는 아기 본인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 친구를 사귀면서부터는 타인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지만, 남에게 깊이 공감하는 데까지 나아가진 못한다. 성인이 되면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의미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유기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존재의 의미를 사회로 점차 확장해나가는 과정이 바로 성장이다. 타인에게 깊이 공감하는 단계는 성장과정에서 상당히 뒤쪽에 위치한 단계이고, 선행 과정이 원활하지 않으면 끝내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나더러 잔인하고 냉정하다 말하는 어른들은 그런 말이 내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는지 알까. 단호한 태도로 나를 안 좋게 판단하는 어른들을 보면 정말 잔인한 사람이 누군지 되묻고 싶어진다. 그런 어른들의 마음까지도 헤아리고 배려하는 것이 공감이라면 나는 끝내 누군가에게 공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릴 때 다른 사람의 감정에 별 관심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감정을 확인하는 것만도 버거울 시기에 남들 감정까지 헤아려가며 살 수 있는 아이가 얼마나 될까. 특히 사춘기 아이들은 간간이 요동치는 복잡한 감정들의 원인을 몰라 혼란스러워한다. 이런 아이들에게 자기밖에 모른다, 인정머리 없다, 못돼먹었다며 자극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아이가 가족과 친구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동물을 사랑하며, 길가의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까지 소중히 여긴다면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딱히 속상할 일은 아니다. 아이의 마음 안에 공감을 위한 자원이 아직 없어서 그런 것이지 타고난 성향 탓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감의 자원은 경험에서 나온다. 세상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은 공감을 위한 데이터가 거의 없다.


영화 <나 홀로 집에>를 어릴 적엔 깔깔거리며 보았다. 어른이 되어서 TV로 다시 보았을 땐 너무 끔찍해 채널을 돌렸다. 도둑들이 넘어지고, 떨어지고, 날아오는 물건에 맞고, 머리에 불이 붙고, 얼어붙은 발바닥으로 못을 밟 장면들. 어릴 땐 분명 이 모든 게 통쾌한 웃음거리였는데, 커서는 사지가 오그라들 만큼 가학적으로 느껴졌다. 감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비슷한 아픔을 경험으로 가지고 있어야 가능해진다. 아마 어릴 적 나는 그런 아픔에 공감할 수 있을 만한 경험 자원이 부족했을 것이다. 특별히 냉혹한 어른으로 성장하지는 않은 듯하니 말이다.



"슬프니? 그런데 사실 이 정도는 슬픈 일이 아니야. 너보다 못한 상황에 있는 다른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해봐. 그 아이들에 비하면 지금 너는 그야말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행복하다 생각하고 웃으면 정말로 행복해지고, 불행하다고 인상 쓰고 있으면 한없이 불행해지는 거야.


아이들이 '부정적 감정'을 경험하지 못하도록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어른들이 많다. 아이들이 느끼는 감정을 그럴싸 말로 포장하는 어른들도 있다. 안타까운 마음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다. 감정은 자체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일 없다. 감정이란 단지 하나의 자아가 벌어진 현실을 해석하고 반응하는 방식일 뿐이다. 이 방식에는 오랫동안 대를 이어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체계가 존재한다. 그 체계에 따라 자연스러운 감정을 느껴야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울어야 상황에는 울어야 건강한 것이지, 울어야 상황에 웃는다고 해서 울고 싶은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행복해서 웃는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억지로 웃음 짓는다고 해서 찾아오는 행복은 없다. 때마다 다양한 감정들을 깊이 있게 느끼고 그것들을 마음에 가득가득 담아 속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기쁨과 슬픔은 모두 행복을 이루는 중요한 재료들이다.


'내가 슬플 때는 그냥 내 말을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어른들은 지레 안절부절못한다.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려 하고, 서둘러 다시 웃음 짓게 만들려 애쓴다. 하지만 내겐 슬픈 감정을 묵혀 마음에 담을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 소중한 시간을 내 말에 조용히 공감하는 어른들 곁에서 보내고 싶을 뿐이다. 그러고 나면 나는 다시 밝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어른들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안다. 슬플 때 가만히 내 말을 들어주는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지 말이다. 공감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할 말이 있고 답답해도 슬퍼하는 친구가 하는 말의 흐름을 끊거나 반대하지 않는 것. 서둘러 문제를 해치우거나 친구가 느끼는 감정을 왜곡하지 않는 것. 어린아이들에게도 이런 친구가 필요하다. 혼란스러운 감정을 말로 풀어내고 싶을 때 곁에서 들어준 어른을 보고 자란 아이는, 다시 그런 건강한 어른이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깊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감의 밑천은 경험이다. 경험의 폭과 깊이가 한 사람의 공감능력을 좌우한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아이가 다채로운 경험을 쌓아나갈 수 있게 도와야 한다. 사람들의 생김새가 저마다 다른 것처럼 그들이 품고 살아가는 감정의 결도 각양각색이다. 기쁨, 슬픔, 즐거움, 괴로움, 안정감, 불안, 만족감, 불만, 편안함, 어색함, 성취감, 외로움, 아픔, 행복감, 뿌듯함, 보람, 자긍심, 두려움, 무력감, 부끄러움, 짜릿함, 미움, 반가움, 연민. 다채로운 감정의 서랍에 어울리는 경험들을 차곡차곡 담아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 어른들의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결혼, 몰라서 쓰는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