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기 전에 흥미로운 사실 하나. 이 책의 저자 에린 헌터Erin Hunter는 사람이 아니라 팀의 이름이다. 에린 헌터는 일종의 프로젝트 작가 그룹으로, 『전사들』 외에도 『살아남은 자들』, 『용기의 땅』, 그리고 아직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Seekers』까지 다양한 시리즈를 함께 집필한 공동 저자들의 집합이다. 그중 『전사들』 시리즈의 집필에 합류한 작가는 케이트 캐리Kate Cary, 체리스 볼드리Cherith Baldry, 빅토리아 홈즈Victoria Holmes 세 사람이다. 이들 모두 오랜 기간 고양이와 함께 산 경험이 있으며, 그건 아마 이 작품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시리즈의 규모는 방대하다. 『전사들』 시리즈는 2020년 12월 현재 7부 40권까지 출간되었고, 번외편과 가이드까지 따로 발표될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2016년에는 중국의 알리바바 픽쳐스가 이 작품의 판권을 구입해 영화화를 진행 중이라고 하나 구체적인 윤곽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이번에 읽은 책은 『전사들』 시리즈의 3부 '셋의 힘Power of Three'의 3권 '추방Outcast'인데, 서사의 전개는 익숙한 영웅의 성장담으로 그저 평이하다. Outcast는 떠돌이나 방랑자로 해석하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굳이 '추방'으로 번역한 것은 아마도 이번 에피소드에서 '스톰퍼'와 '브룩'이라는 고양이가 부족에서 추방되었던 과거의 사건, 그리고 그로부터 이어진 현재의 상황이 꽤나 비중 있게 다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서사 구조를 이해하려면 먼저 『전사들』 시리즈의 기본적인 세계관과 설정을 간단하게나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야기 속 고양이들은 야생의 환경에서 군대와 같은 조직과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는데, 중요한 등장인물들은 주로 종족Clan에 속해있고, 일부는 부족Tribe에 속해있다. 두발쟁이Two Legs(인간)의 보살핌을 받는 애완 고양이도 있지만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종족은 천둥족, 바람족, 그림자족, 강족으로 나뉘며 모든 종족 고양이는 새끼 고양이에서부터 훈련병을 거쳐 전사 또는 치료사로 성장한다. 이들 종족 고양이에게는 이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쓰이는데, 새끼 고양이의 이름 뒤에는 킷kit(kitten)이라는 애칭이 붙고, 훈련병의 이름 뒤에는 포paw라는 애칭이 붙는다. 훈련병 과정을 마치고 시험을 통과한 고양이는 전사/치료사 임명식 때 지도자 고양이로부터 명예로운 이름을 수여받는다. 그리고 지도자의 이름 뒤에는 스타star라는 호칭이 붙는다. 종족 고양이들에게 이름은 곧 계급이다.
이에 비해 부족 고양이들은 한 층 느슨한 규약 아래서 생활하는 듯 보인다. 이들은 조직력과 전투력 측면에서 종족 고양이들에 한참 뒤진다. '추방' 에피소드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물여울 부족의 고양이들이 제 힘으로 거주지의 경계를 지키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다. 물여울 부족은 과거 패배한 전투의 책임을 물어 추방했던 스톰퍼와 브룩에게 도움을 청하러 천둥족 진영에 찾아온다. 부족에서 쫓겨나 천둥족에 정착한 스톰퍼와 브룩은 처음엔 부족 고양이들을 적대하지만, 천둥족의 부지도자 브램블클로는 다른 종족과 함께 부족을 도울 전사를 파견하고, 스톰퍼와 브룩도 여기에 합류한다. 며칠 간의 여정 끝에 물여울 부족의 거주지에 도착한 종족 고양이들은 부족 고양이가 침입자에 맞서 자기네 영역을 지킬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시키고 함께 전투에 나선다. 이 과정에 천둥족 훈련병 셋이 동행하는데, 그들이 바로 『전사들』 시리즈 3부 '셋의 힘'의 주인공인 제이포, 홀리포, 라이언포이다. (이들은 후에 제이페더, 홀리리프, 라이언블레이즈라는 이름을 수여받는다.) '추방'은 이 어린 훈련병들이 익숙한 진영을 떠나 물여울 부족을 돕기 위한 원정대에 합류하면서 경험하는 일과 그로부터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전사들』의 고양이들은 확고한 신앙 체계를 가지고 있다. 종족 고양이는 '별족'을 숭배하고, 부족 고양이는 '끝없는 사냥 부족'을 숭배한다. 이야기의 설정에 따르면, 이들의 신앙은 단순한 희망이나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단단한 실체를 기반으로 하는 그들 정체성의 뿌리이자 핵심이다. '별족'과 '끝없는 사냥 부족'은 각각 종족과 부족의 조상이며, 죽은 고양이들이 사후에 속하게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들은 가끔 지도자나 치료사 고양이들의 꿈에 나타나 계시를 내리며 후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 노력한다. 아마 이것이 이 작품의 장르적 특징을 가장 선명하게 부각하는 장치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가 고양이들의 판타지라는 점은 주목할 만큼 놀라운 설정은 아닌 듯하다. 종족 간 힘겨루기와 영역 분쟁, 나아가 전투와 전쟁이라는 장대한 서사를 끌어가기에 고양이의 동물적 습성은 그리 유리한 요소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작품 속에서 네 종족의 거주지 진영은 어느 언덕의 꼭대기에서 한눈에 보이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세계관의 공간적 규모가 우리가 잘 아는 고양이의 활동 반경에 맞추어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협소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판타지에서는 몇 가지 설정으로 온갖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은 애초에 고양이를 세계의 지배종으로 묘사하지도 않았고, 인간의 역사를 대체하거나 고양이의 동물적 습성을 초월하여 의인화하는 데에도 별 관심이 없다. 이 작품이 <스타워즈>보다 <해리포터>에 가까울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자연주의적 설정에서 기인하는― 세계관의 확장에 대한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고양이가 갑자기 말을 타고 달리지 않는 이상 이야기 속 고양이들의 모험이나 원정, 전투와 전쟁은 모두 그 근방의 가까운 어딘가에서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무리해서 세계관을 확장하려다간 『얼음과 불의 노래』의 에피소드가 중세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것 같은 어색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만큼의 길고 묵직한 서사를 꾸려냈다는 건 이 작품이 굉장히 복잡하고 섬세한 인물 관계도를 바탕으로 매력적인 사건들을 연출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결국 설정보다도 이야기 자체가 지닌 매력이 『전사들』의 세계관을 지탱하고 견인하는 동력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