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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 Jan 07. 2018

폭력적인 아이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면 안 되는 이유

우리는 종종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 드는 아이들을 본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어른들의 방식은 다양하다. 친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나쁘다고 타이르는 사람도 있고, 맞는 것보다는 차라리 때리는 것이 낫다며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는 사람도 있다. 지금 폭력적인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커서 곤란해진다며 설득하려는 사람도 있고, 폭력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라고 단호하게 선을 긋는 사람도 있다. 보통은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보는 경우가 많다. 좋은 말로 타일러 보고, 단호한 표정과 말투로 야단쳐보기도 하고, 폭력이 가져올 수 있는 다양한 사례를 예로 들며 위협하기도 한다. 문제가 심각할 때는 전문가의 상담을 받기도 하고, 분노와 무력감에 매를 들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명백히 옳지 않은, 아이에게 매우 폭력적으로 느껴질 방법을 그 자신이 사용하기도 한다. 옳지 못한 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어른들도 감정이 소진되면 아이같이 본능적, 즉각적 방법을 선호하게 되기 때문이다.



"왜 너는 항상 너보다 약하고 어린 아이에게만 거칠게 대하니. 내가 너 말썽 부릴 때마다 그렇게 한다고 생각해봐. 받아들일 수 있겠어? 지금 네가 하는 짓은 다 폭력이고 나쁜 짓이야. 자꾸 모든 일을 힘으로 해결하려들면 나도 힘을 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사실 폭력은 우리가 사용할 수만 있다면(법적으로 허용된다면), 거의 모든 상황에서 가장 확실하고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방법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그것이 타인의 부당한 폭력을 제지하기 위한 수단일 때는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한 행동이 폭력적이었고 옳지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나를 야단치는 어른들도 옳지 않은 행동을 하며, 때로 나보다 훨씬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이 하는 말에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들 자신의 행동이 그들의 말을 뒷받침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른들은 알고 있을까.'


폭력이란, 물리력의 차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목적을 다른 사람에게 강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른들이 자신의 힘을 인식하고 그 효과를 직간접적으로 이용하여 아이를 침묵시키는 일은 모두 폭력이다. 흔히 아이를 향한 보호자들의 (적당한 수준의) 폭력은 궁극적으로 아이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합리적이며 정당하다 간주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폭력은 엄연한 폭력이다. (어른이 아이에게 행사하는 합리적 폭력은 구조적으로 국가가 국민에 대하여 행사하는 공권력과 같다. 오남용 되지 않는 공권력은 합법적, 독점적 '폭력'이다. 그 폭력의 압도적 무게에 눌려 사회의 질서가 간신히 유지되는 것처럼, 어른의 폭력은 유사시 아이의 행동을 짓누를 수 있는 강력한 물리력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어른들의 폭력에 정당성과 합리성을 부여하는 논리도 실은 어른들 그 자신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업그레이드된다는 점에서 아이에겐 불공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가 폭력을 휘두르면 휘두르는 대로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아이들의 폭력 문제를 다룰 때 스스로 절대적 기준이라도 가진 것처럼 고압적으로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조적으로 아이들을 다루는 메커니즘 자체가 일련의 물리적, 합법적 폭력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를 바탕으로 폭력의 어떤 면이 위험한지 아이들과 수평적으로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식으로는 원활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 아이가 폭력적이라 느끼는 어른의 관리 방식이, 아이가 분노에 차 저지른 원초적 폭력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대화를 통해 알려주어야 한다. 아이가 폭력적일수록 더 끈질기게 대화해야 한다. 엄청난 정신력이 요구될 것이다. 감정도 모두 소진되어 기진맥진해질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이 과정을 견디지 못해 극단적 폭력을 휘두르게 되면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폭력을 쓰지 말고 말로 하라니까. 말로 안 되면 주위 어른들께 도와달라고 하든가. 왜 네가 먼저 폭력을 써서 상황을 더 불리하게 만드니. 너 때문에 미치겠다."


'언제까지나 어른들에 기대어 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그것이 정말 옳은 방법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난처한 상황에서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해봤지만, 그럴 때마다 문제의 원인은 내 모난 성격에서 발견되곤 했다. 어른들의 틀 안에서 나는 언제나 참을성 없고 이르기 좋아하는 이기적인 아이였다. 결국 나는 내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마저 모두 내 잘못이라고 한다면 그저 본인들이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기 싫어 내게 책임을 지우는 것뿐이라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어른들의 방식은 정말로 옳은가.'


세상 모든 문제가 말로 해결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은 복잡하고 문제는 모순 덩어리다.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같은 문제라도 이를 바라보는 서로의 생각과 감정이 모두 다르다. 결국 말끔한 해결방법이란 있을 수 없고, 어느 한쪽의 양보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양보는 대개 성격이 온순한 사람의 몫이다.


한편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 말로는 아무리 해도 소용없다는 직감이 엄습한다. 결국 언성이 높아지고 폭력이 발생한다. 사건은 곧 어른들에게 알려지고, 이제 문제의 본질은 사라진 채 폭력의 책임 소재를 가려내는 일만이 중요해진다. 그리고 누군가는 더 큰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문제는 이런 과정도 일종의 더 큰 폭력의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가 아이를 다루는 방식에 이미 폭력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원시적인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 누군가를 단죄하고 책임을 물으려면 보다 정교한 논리가 필요하다. 이 정교한 논리를 구성원 모두에게 내면화시키려면, 모두가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압도적 폭력을 합법적으로 소유한 주체가 필요하다. 현대에는 국가나 정부가 이러한 주체로서 기능하는데, 어른과 아이의 관계도 구조적으로 이와 동일하다. 아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어른들의 자격은 합법적 폭력의 가능성에서 나온다. 어른이 아이보다 도덕적이라는 증거는 빈약하고 오히려 반례로 넘쳐나지만, 어른이 아이보다 물리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물론 필요하고 합리적인 일이지만, 아이의 주관적 감정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고 억울한 마음만 남는 것이다.


'어른들은 항상 자기들 기준으로 문제를 규정하고는 서둘러 해치워버린다. 내가 무슨 골칫덩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아이가 갈등 상황에서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나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아이가 스스로 나쁜 사람으로 오해받고 있다는 억울한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폭력의 어떤 면이 위험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지를 따뜻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단호하게 타이르고 책임을 묻는 일은 가장 마지막에 할 일이며, 선행 과정이 자연스럽고 원활하게 이루어진다면 아이 스스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 사회의 어린이들은 '맞아야 사람 된다', '싸우면서 크는 거다'라는 말을 예사로 들으며 자랐다. 폭력은 일상적이었고, 그만큼 감각은 무뎌졌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맞고 들어온 학생이 집에서 두 번 맞을까 봐 맞은 부위를 감추는 모습은 그리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다툼 끝에 드잡이를 하다 몸 군데군데 생채기가 나는 일도 별 대단한 사건이 못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폭력에 대한 사회의 반응과 대응이 점차 정교해지면서, 폭력은 일상에서 한걸음 물러섰다. 폭력을 일상적으로 겪어보지 못한 아이들일수록 단 한 번의 사소한 폭력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충격받는다. 이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함부로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그 폭력이 매우 정교한 논리 아래 이루어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어떤 면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에게 스며든다. 그러므로 수준 높은 반성과 성찰은 언제나 어른의 몫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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