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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챗지피티

by 달리

오랜만에 포스팅을 하네요. 요즘도 글은 쓰고 있고, 책도 읽고 있지만, 블로그에 뭘 써서 올리고 싶단 생각은 잘 들지 않습니다. 쉬던 블로그에 갑자기 뭔가를 써서 올린다고 하면 왠지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끼는데, 사실 별 이유는 없고, 그나마 가장 가까운 이유라면 '심심해서' 정도가 될 것 같아요.


요즘 모두가 챗지피티로 글을 쓴다고들 합니다. 저도 챗지피티가 보여주는 퍼포먼스에 대해선 경이감―지금은 많이 무뎌졌지만요―을 가지고 있고, 잠깐동안 이것저것 시도해보기도 했지요. 예컨대 'A라는 주제로 소설을 쓸 거야. B라는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 C라는 위기를 단계적으로 극복하는 서사 전략을 장르별로 추천해 줘.'라고 했을 때 꽤 그럴싸한 답변이 나오는 걸 보고 신기해한 적도 있어요. 이런 답변을 참고해서 뭔가를 진짜로 써낸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도가 될 수 있겠죠. 그런 생각으로 챗지피티를 둘러싼 현상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기류는 또 달라진 것 같아요. 이제 사람들은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챗지피티에 의존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골치 아픈 리포트나 논문 같은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바람직한 건 아니겠지만요.) 그보다 제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건, 보지 않은 책과 영화의 줄거리, 최근 이슈가 된 뉴스나 트렌드에 대해 취해야 할 입장, 다툰 친구와 화해하기 위한 멘트, 호감 가는 사람에게 건넬 만한 선물, 고백 멘트 같은 걸 챗지피티에게 물어보는 사람들의 심리죠.


저는 제가 써야 할 글이나 쓰고 싶은 글을 지피티에게 써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제가 써야 할 글이라는 것은 주로 업무 연락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교사이고, 매일 업무와 관련된 짧은 글을 써야 합니다. 동료 교사에게 보내는 협조 요청이나 학생과 그 보호자에게 보내는 안내문, 학생의 학교생활 전반에 관한 평가 결과 같은 것들이죠. 그밖에 제가 쓰고 싶은 글이라는 건 대개 문학 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지금은 소설 몇 편을 꽤 공들여 만지작거리고 있고요.


이 두 영역에 관한 한, 저는 앞으로도 지피티에게 글을 써달라고 할 마음이 없습니다. 고루하게 보일 거라는 건 알아요. 지피티와 협업한 뛰어난 결과물들이 분야를 막론하고 쏟아져 나오는 판국에, 시대착오적인 순수주의를 추종하는 느낌도 들고요. 가끔은 내가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서 지금껏 변변한 작품 하나 완성을 못 시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확신할 수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지피티에게 제 글을 양보할 생각이 없습니다. 양보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썩 좋지 않거든요. 이 기분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저의 그런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우주의 중심에 두고 봤을 때, 요즘 지피티를 둘러싼 기류는 기괴하기 짝이 없습니다. 보지 않은 책과 영화에 대해 지피티에게 물어본다는 건, 내가 경험할 수 있었을 어떤 가능성들을 통째로 지피티에게 위임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책과 영화를 들여다보는 건 1인분의 삶으로 다 체험할 수 없는 것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함으로써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위한 거라고 늘 생각해 왔는데, 이젠 그것들마저 지피티한테 외주를 주고, 심지어 그걸 효율이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포장하는 시대가 됐어요.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도 그래요. 화해의 멘트, 사랑을 전하는 선물, 고백할 타이밍과 건넬 말을 죄다 지피티에게 물어보는 게 별로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고, 전 그게 너무 이상합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생각이라는 걸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실패하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요. 실패는 언제나 고통스럽고, 우리는 고통을 유발하는 요인을 최대한 피하도록 설계된 기계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챗지피티는 인간의 기계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도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챗지피티로 얻은 답변을 그대로 들고 와서 우쭐대며 읽는 사람을 본 적 있습니다. 물론 그만한 답변을 얻으려면 잘 구조화된 좋은 질문을 던져야 했겠지만, 그럼에도 자기 것이 아닌 텍스트를 읽으며 뿌듯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던 그의 모습은 참 허무했지요. 그 사람은 그게 '요즘 유능하고 스마트한 사람이 일하는 방식'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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