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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신의 등장

한국 SF 동화에 나타난 AI

by 달리

2025년 11월 8일(토)에 열린 제42회 한국아동문학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의 주제는 'AI시대 아동문학의 정전과 아동문학교육'이었습니다. 저도 몇 시간 전에 'SF 동화에 나타난 AI'란 주제로 발표에 참여했는데 재미있었습니다. 아래는 발표문 전문입니다.



Ⅰ. 쉬운 것과 좋은 것

모두가 AI를 말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AI가 얼마나 훌륭한 비서이며, 작가이며, 화가이며, 작곡가이며, 번역가이며, 상담가이며, 이론가이며, 철학자인지 주변에서 흔하게 듣는다. 말들이 향하는 결론은 단순 명료하다. 'AI는 못하는 게 없다.'

최근 AI 기술이 보여주는 경이로움과 이를 반기는 사회 일반의 분위기를 감안하더라도 그것이 지금 우리의 일상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는지 떠올려보면 새삼 놀라게 된다. 기계와 컴퓨터를 조작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일은 본디 숙달된 전문가의 영역이었다. 멀리 갈 것 없이 5년 전만 해도 인간과 기계가 서로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는 인간이 기계의 언어, 곧 알고리즘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기계에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이 알고리즘이라는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전문 인력들이었다. 비전문가들은 터미네이터류의 영화에 열광하면서도 AI의 작동 원리와 퍼포먼스 같은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5년 사이에 상황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전문지식의 유무를 막론하고 모두가 AI를 논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인간과 기계 간 소통 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한몫을 톡톡히 했다. 지금은 기계가 인간의 자연어를 학습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과 소통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실 인간은 자기네 언어를 그다지 매끄럽게 다루지 못할 때가 많은데, 현시점의 AI는 그런 허술한 언어에 담긴 요구도 놀라울 만큼 빈틈없이 처리한다. 심지어 그들은 핀잔도 하지 않는다.

요컨대 힘들게 알고리즘을 공부하지 않아도 누구나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를 통해 필요한 결괏값을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알고리즘 전문가의 영역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간간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굳이 힘들게 노력할 필요 없어. 때가 되면 더 쉽고 효율적인 게 알아서 튀어나와 정답을 알려줄 거야.

오늘날 '인지적 구두쇠Cognitive miser(Susan Fiske, 1984)' 개념이 다시금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기술의 가파른 발달에 따라 개인의 인지적 노력을 최소한으로 투입하고자 하는 경향은 이제 하나의 뉴노멀 또는 시대정신으로 굳어져가는 듯하다. 사람들은 극도로 개인적이고 다층적인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에도 '챗gpt에게 물어보세요' 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실은 벗어나야 할 이유도 잘 모른다. 쉽고 간편한 것은 어느덧 좋은 것이 되었다.

그러면 오늘의 아동문학은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아쉽지만 나는 아직 한국의 아동문학장이 이 문제를 주요 의제로 올릴 만한 인식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본다. 한국의 동화 세계에서 AI는 가성비 좋은 장난감 정도의 위치에 머물러 있다. 이는 AI의 양면성을 고르게 조명하는 작품, 나아가 AI의 부정적 영향력을 드러내어 강조하는 작품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 작품들이 AI를 으스스하게 묘사하는 건 대개 그 장르에서 익숙하게 수용되는 클리셰를 참조한 것일 뿐, 생각하기를 기피하는 인간들의 어떤 인지적 마비 현상을 짚고자 함은 아니다.

물론 문학작품 속 AI가 꼭 의미심장한 사회 현상을 포착하는 용도로만 쓰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이 특정 소재를 채택하는 이유는 복합적이므로 누군가 그걸 일률적으로 통제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까지 아동문학이 AI를 묘사하고 소비해 온 방식이 더는 그리 신선하거나 다채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지적될 필요가 있다.

주지하는 바 이제 어떤 아동문학작품에 AI 인격체가 등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딱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특별한 시도로 보이지는 않게 되었고, 그렇기에 쟁점은 곧장 각론으로 향한다. 요컨대 이 글의 관심사는 이것이다. 한국 SF 동화에서 AI는 작가와 독자의 인지적 인색함을 얼마나 부추기고 있는가. 그러한 경향은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더욱 공고해지거나, 반대로 누그러질 것인가. 쉬운 것은 정말로 좋은 것인가.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먼저 지금까지 나온 SF 동화 속 AI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Ⅱ. 무능한 AI의 유용함

간단한 질문으로 시작하자. AI가 등장하는 동화는 SF인가. 절대적 기준까지는 아니지만 지금까지는 대체로 그렇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독립된 인격을 가지고 타인과 상호작용하는 AI는 그 자체로 미래적 요소로 간주되었고 이야기는 자연히 SF 장르의 규범에 따라 해석되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동화들이 스스로 SF 장르의 정체성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AI가 나오는 동화를 쓰는 작가들은 자신이 SF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고, 좋은 SF를 쓰고자 했다.

앞으로는 어떨까. AI는 이전에도 SF의 전유물이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더욱 빠르게 SF 장르에서 분화해 나갈 것이다. AI가 SF와 완전히 무관해질 거라는 뜻은 아니다. AI는 언제나 SF의 주요한 관심사였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동화가 AI를 다룰 때 SF 장르의 규칙과 클리셰를 적극적으로 참조하는 경향은 지금보다 눈에 띄게 줄어들 거라는 의미다. 현실 속 AI의 진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고, 그에 따라 SF 동화에 느슨하게 묘사된 AI는 그 매력과 개성을 빠르게 잃어가고 있다. 이 틈은 단기적으로 리얼리즘 영역에서 메우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이 분야에 관한 한 아동문학 작가들의 상상은 현실보다 확실히 느리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작품들을 보아도 그렇다. 예컨대 2025년의 챗gpt는 『담임 선생님은 AI』(창비, 2018), 『빨간 아이, 봇』(허블, 2021), 『에이아이 내니』(고래가숨쉬는도서관, 2021), 『나를 닮은 친구 A.I.』(머스트비, 2021), 『AI 디케』(마루비, 2021), 『나의 수호천사, AI 큐피드』(청어람주니어, 2023), 『리보와 앤』(문학동네, 2023), 『AI 도시 마테』(오늘책, 2023)와 같은 작품들에 나온 AI보다는 똑똑한데, 근미래 SF에 등장하는 AI가 현실의 챗gpt보다 지능이 떨어지는 이런 설정은 어쩔 수 없이 작품의 매력을 줄이는 요인이 된다. 배경이 수십 년 뒤인 SF에 등장하는 AI 로봇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만든 뻔한 규칙에 묶여 움직인다고 상상해 보라. 일단 따분하지 않은가.

한 가지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은, SF 문학이 AI의 발전 방향과 속도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작품의 완성도가 딱히 떨어진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는 미래를 잘 예측한 SF가 그것만으로 뛰어난 문학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명하다. SF에서 예측의 개연성과 문학적 완성도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고,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SF가 기술의 발전을 정확히 예측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다만 불과 2~3년 전까지도 무난하거나 시의적절해 보이던 AI에 관한 일부 가정들이 어째서 그리도 빠르게 빛이 바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히 주시할 필요가 있다.

물론 여기에는 참작할 만한 사정이 있다. 모든 문학작품 속 AI는 작가가 필요로 하는 만큼만 똑똑하다는 것이다. 도입부에 명석한 두뇌를 뽐내던 AI가 중반부를 지나며 점차 흐리멍덩해지는 데에는 그런 실용적인 맥락이 숨어 있다. 일반적으로 작중 AI 캐릭터에 빈틈이 없을수록 주인공은 보다 길고 지난한 여정을 소화해야 하고, 이는 자연히 이야기의 분량을 늘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나오미 크리처Naomi Kritzer의 『캣피싱Catfishing on CatNet』(허블, 2021)에 나오는 AI의 지능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절반 분량으로 줄이는 노하우 같은 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야기를 짧게 매듭지으려면 AI가 적당한 지점에서 적당히 허술하게 굴어주는 편이 아무래도 유리하다.

『에이아이 내니』를 예로 들어보자.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내니'는 AI 돌봄 로봇이다. 내니의 임무는 주인공 '별이'가 만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보살펴주는 것이다. 별이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기 때 버림받아 외톨이가 되었고, 내니는 그런 별이가 이 세계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처음에 내니는 어린 별이의 인지적, 정서적 욕구를 섬세하게 채워줄 수 있는 존재로 묘사되지만, 이후 전개 과정에서 내니가 돌봄 외 영역에서는 아주 무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내니는 인간의 해킹 시도 한 번에 일시적으로 모든 기능이 멈추고, 별이를 맡길 보육원을 알아보기 위해 굳이 먼 곳까지 직접 가서 발품을 팔고, AI 로봇 제작사인 '심테크'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얼핏 보기에도 어설픈 트릭을 쓴다. 그리고 이 모든 허술함은 이야기가 각 구간의 난관을 뚫고 결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편리한 돌파구로 기능한다. 만약 내니가 돌봄 영역 바깥에서까지 유능했다면 이야기는 훨씬 더 길어져야 했을 것이다.

『리보와 앤』의 1인칭 주인공 '리보'도 마찬가지다. 도서관 안내 로봇인 리보는 어느 날 갑자기 도서관 이용객들이 사라진 원인이 신종 바이러스라는 명백한 사실을 몰라 한참을 헤매는데, 그 사연이 자못 흥미롭다. 리보는 독립적 사고와 판단이 가능한 고성능 로봇이지만, 웹에 접속하여 뉴스를 검색하는 간단한 기능은 수행할 수 없다. 그러니까 독자에겐 '신종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쉽게 이해되는 사건이, 리보에겐 익숙했던 세계가 한순간에 풀 수 없는 미스터리로 변해버린 사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리보의 무능함은 물론 작가의 의도에 의해 기획된 것이다. 현상에 대한 리보의 무지와 무구함은 작품을 관통하는 이미지, 곧 코로나 시국에 세상과 단절된 채 집집마다 남겨졌던 어린이들의 모습에 포개어지며 의미를 획득한다. 다시 말해 리보의 무능함은 이 이야기가 결말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핵심 동력이자 꼬인 실타래를 푸는 실마리로서 기능한다. 리보가 유능하면 실타래는 더 복잡하게 엉키고, 이야기도 그만큼 길어져야 한다.

그러니까 AI의 성능이 애초의 기대보다 떨어지는 이런 설정은 어느 정도는 창작자의 필요에 따라 고의적으로 연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능한 AI에 대해 독자가 갖는 모든 의문이 곧장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독자들이 작중 AI의 엉성함에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 엉성한 AI도 대개 그 세계의 인간들보다는 똑똑해서 대립 구도 상 비교 우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결국 작중 AI의 성능이 떨어지면 그 AI가 존재하는 세계 전체가 다운그레이드된다는, 꽤나 골치 아픈 문제가 파생한다.

『AI 디케』를 예로 들어 보자. 이 작품에서 '디케'의 임무는 오로지 학생들을 테스트하여 등급별로 나누는 것뿐이다. 이 세계의 학생들은 디케에 의해 예비 테스트와 본 테스트를 받아야 하는데, 주인공 '지오'는 예비 테스트에서 최하위권에 해당하는 X 등급을 받아 남극의 황제펭귄에게 먹이 주는 일을 배당받는다. 황당한 것은 디케라는 이름의 AI 시스템이 정확히 어떤 메커니즘으로 작동하는지, 무슨 자격과 근거로 한 사람의 평생을 좌우할 진로를 결정하는지, 테스트 과정에서 비리가 일어날 소지는 없는지, 디케가 정말 AI이기는 한 건지, 이 세계의 인간들이 하나도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완벽하게 중립적으로 작동하는 AI'라는 다분히 맹목적인 가설을 '그냥' 믿는다. 디케 테스트에 회의적인 견해를 가진 이들조차 연대하여 체제에 저항하기보다 혼자 테스트에서 이탈하는 방식으로 각자도생을 추구한다. 심지어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디케 시스템은 건재하다. 나에게 이곳은 도무지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SF의 세계관은 때로 이렇게나 헐겁게 구축된다.

이번엔 『AI 도시 마테』를 보자. '마테'가 AI 도시인 이유는 도시 시스템에 인공지능이 탑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도시를 설계하고 관리하는 주체가 AI 로봇이기 때문이다. 마테는 인간 입주민과 AI 로봇들이 공존하는 실험 도시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AI는 불필요하다고 할 만큼의 허술함으로 독자의 의문을 자아낸다. 마테의 AI는 굳이 로봇 몸체 안에 들어가 인간의 신체적 제약을 모방하고, 규정을 위반한 인간을 공개적으로 퇴출하는 방식으로 위화감을 조성하고, 일관적이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인간과 대립 구도를 형성한다. 이야기의 시작 부분에서는 마테의 입주민 500 가구를 모집하는데 10만 가구가 지원했다는 내용이 언급되는데, 과연 이 공간에 200대 1이란 경쟁률만큼의 가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이곳은 아무 매력이 없다.

물밑의 맥락을 전혀 종잡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작품들이 AI를 다분히 의뭉스러운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가 우리 편인지 아닌지 끝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것은 SF에서 흔하게 쓰이는 서사 전략의 하나다. '인간을 지배하고자 하는 AI'는 SF에서 가장 고전적인 클리셰 중 하나이고, 그만큼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AI가 AI로서 가질 수 있는 강점에 집중하기보다 그저 클리셰의 도구로만 취급하는 작품에 그런 고전적인 스릴과 서스펜스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AI가 등장했으면, 일단 AI 답게 움직여야 한다.

어쩌면 이것은 태도의 문제일 수 있다. 다수의 작품이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무능한 AI를 관성적으로 활용하고 있고, 이런 흐름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AI가 작품의 주제로 직결되는 중요한 재료일 때에도 그렇다. SF에 AI가 나오는 것은 전혀 어색한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구멍 난 자리를 땜질하듯 AI를 가져다 쓰는 일들이 마냥 흥미롭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앞서 말했듯 어떤 AI는 그 자신이 속한 세계 전체를 허약하게 만들고, 그러면서도 너무나 쉽게 독자를 의도된 목적지로 데려다 놓기 때문이다. 요컨대 쟁점은 AI를 활용한 스토리텔링이 모든 걸 너무 쉽고 편하게 만들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이제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자.


Ⅲ. 플라스틱 신의 등장

강아지가 주인공인 동화 한 편을 보자. 이 강아지는 뇌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은 뒤 사랑하는 주인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다음 장면에서 강아지는 낯선 이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간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동물 시체로 가득한 쓰레기장이다. 강아지는 주인과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려보지만 극적인 반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강아지는 쓰레기 더미 위에서 마지막 숨을 뱉고, 그것으로 짤막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당신은 이 동화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짐작건대 현실이 아무리 잔혹할지라도 동화가 강아지를 이런 식으로 다루는 것을 좋아할 독자는 그리 많지 않다. 보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동화 속 강아지는 고난을 겪을 때 겪더라도 끝에 가서는 웬만하면 행복하게 사는 게 좋다. 독자가 그걸 좋아하고, 좋아하는 걸 넘어서 그게 옳다고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최근에 가장 모범적이면서도 탁월한 감각을 보여준 작품은 진형민의 『왜왜왜 동아리』(창비, 2024)인데, 기후 위기에 대한 갖은 수식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가장 소중하게 어루만지는 것은 결국 '다정이'라는 이름의 한 마리 개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작고 연약한 생명들에 대한 경의이며, 거대한 재난 앞에서도 결코 놓아선 안 될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다.

동화 속 강아지는 절대로 죽어선 안 된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문학이란 테두리 안에서 작고 연약한 생명을 다루는 일이 꽤나 까다로운 작업이라는 사실을 환기하면서, 나아가 그 까다로운 작업을 상당히 수월하게 만드는 우회로가 있음을 짚고자 할 따름이다. 그에 앞서 고백할 것은, 위에서 소개한 강아지 이야기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반면에 다음의 이야기는 실제로 존재한다.

하신하의 단편동화 「달로 가는 길」(『우주의 속삭임』(문학동네, 2023) 수록)은 매우 복잡하고 다채로운 결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이지만, 긴 설명을 빼고 최대한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주인공 AI 로봇이 자기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공장으로 끌려가 폐기되는 이야기이다. 결말부에 묘사되는 로봇의 폐기는 인간의 죽음과 질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낡고 고장 난 인간형 로봇을 내다버리고 끝내 죽게 만듦으로써 이야기를 매듭짓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의 끝문장은 '마침내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인데, 쓸모를 다해 버려진 로봇의 1인칭 시점에서 발화되는 이 마지막 말은 한 개체를 넘어 마치 우주 전체가 소멸하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독자의 마음에 짙은 여운을 남긴다.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짙은 여운을 남긴다'라고 썼는데 정말 그런가. 이 작품의 주인공 로봇은 어린이의 모습을 하고 있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지냈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며, 마지막까지 순진무구하게 묘사된다. 그런 무해한 존재를 차가운 고철 더미 속에 밀어 넣고 그 안에서 생을 마감하도록 하는 것은 강아지를 쓰레기장에서 죽게 만드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나는 이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이 앞으로 한국 SF 동화가 AI를 다루는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작가는 독자가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느낄 혐오감을 간과할 수 없고, 실제로 이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SF에서 그렇게 쓰이는 도구 중의 하나가 바로 AI 로봇이다. 아무리 허구의 이야기라 해도 인간형 로봇을 폐기하는 것이 인간을 죽이는 것보다는 쉽고, 비정하지만 강아지 로봇을 폐기하는 것이 강아지를 죽이는 것보다는 쉽다. 그럼으로써 적당히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끔찍하고 잔혹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쉽다.

SF 세계에서 도처에 존재하는 이런 대체품들의 쓰임새는 가히 플라스틱에 비견할 만하다. 우리가 흔히 '가소성(Plasticity)'이라 일컫는 일군의 속성은 기술적으로 플라스틱 성질을 의미한다. 주물 틀에 맞추어 한 번 빚어놓으면 이후 큰 변형이나 왜곡 없이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플라스틱은 현대 사회가 추구하는 편리함의 상징과도 같은 물질이다. 지금 SF 동화에서 그렇게 실용적으로 쓰이는 소재를 꼽으라면 단연 AI다. 그러나 단지 편리하다는 공통점 하나에 기대어 AI를 플라스틱에 빗대고 이를 마치 문학적 오염물질이라도 되는 양 말하는 것은 지나칠 뿐 아니라 유치하다. 나는 AI의 부정적 영향력을 드러내기 위해 가소성 개념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본질적 차원의 유사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독립적 사고와 판단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로봇까지 넓게 AI로 간주한다면, AI는 SF 작가가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이 되어줄 수 있다. AI는 질문에 척척 답을 내어주는 백과사전일 수 있고(남유하, 「이모티콘 필터」, 『나라는 우주』(사계절, 2023) 수록), 재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전학생일 수도 있고(남세오, 『너와 내가 다른 점은』, 씨드북, 2023), 엉뚱한 매력의 담임선생님일 수도 있고(『담임 선생님은 AI』), 외로운 아이를 위한 맞춤형 돌봄 프로그램일 수도 있고(『나의 수호천사, AI 큐피드』), 묵묵하고 수더분한 도서관 안내로봇일 수도 있고(『리보와 앤』), 어릴 적 죽은 친구를 되살리기 위해 과거로 보내진 시간여행자일 수도 있고(오하림, 『순재와 키완』, 문학동네, 2018), 인류를 위해 머나먼 행성에 파견되어 외로이 임무를 수행하는 탐사대원일 수도 있고(하신하, 「타보타의 아이들」, 『우주의 속삭임』(문학동네, 2023) 수록), 멸종 후 우주적 규모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태어날 첫 인류의 친구들일 수도 있다(이퐁, 「돔돔세 견문록」, 『인터스텔라 여름방학』(문학동네, 2025) 수록). 다른 게 더 필요한가? 문제없다. 원하는 틀에 넣고 단단하게 굳힌 다음 꺼내 쓰기만 하면 그만이다. 안 되는 것은 없다. SF 세계관을 설계하다가 해결이 필요한 문제에 부딪히면, 그 문제를 다루는 기능이 탑재된 AI를 만들면 된다. 이 분야에서 AI는 플라스틱 신과도 같다. 물론 고민 없이 온갖 곳에 AI를 남발하다 보면 작품의 매력이 떨어지거나 얕은 세계관이 노출될 위험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건 한 걸음 나아간 이후의 고민거리다. 이야기가 길을 잃은 단계에서는 AI만큼 매혹적인 도구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야기 속 AI가 반드시 현실의 AI를 모방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작가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된다. SF의 독자들은 온갖 기상천외한 장치가 존재하는 세계관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고, AI가 현실과 다른 방식으로 기발하게 움직일 때 가장 크게 박수를 쳐줄 사람들이기도 하다. 다음의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강담마의 『쥐들 G들』(밝은미래, 2025)에서 '쥐'는 우리에게 익숙한 동물 쥐고 'G'는 로봇 쥐다. 두 집단, 곧 쥐들과 G들은 서로 대립 관계에 놓여 있다. 인간이 쥐들을 박멸하기 위해 쥐들을 꼭 닮은 G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집단 사이에 '보니'와 'GG'가 있다. 보니는 다른 쥐들처럼 인간을 피해 땅속에 숨기를 거부하고 혼자서 바깥세상으로 나온 동물 쥐이고, GG는 다른 G와 달리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 쥐다. 다시 말해 보니와 GG는 각각 쥐들과 G들을 대표하는 입장이면서, 모집단의 행위 패턴을 내면화하지 않은 일종의 돌연변이인 셈이다. 이야기는 두 주인공이 각 집단의 주류 논리에 매몰되지 않고 각자 자기만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확립해 나가는 구조 속에서 흥미롭게 전개된다.

쥐와 G의 발음 상 유사성에 착안한 언어유희도 물론 좋지만 이 작품에서 더욱 기지가 돋보이는 부분은 GG가 AI 인격체로서 활약하는 장면들에 있다. GG는 인간의 언어와 쥐의 언어를 모두 구사하는데, 언뜻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능력이 GG로 하여금 독자적인 가치 판단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처음에 GG는 개발자인 민 소장의 지시에 따라 동물 쥐들의 서식지를 찾아내고 유인하는 임무를 수행하지만 보니와의 대화를 통해 그게 옳지 못한 일이라는 걸 깨달아간다. 결말에서 GG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로봇 쥐가 아닌 동물 쥐 무리라고 선언하는데, 이처럼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하는 AI를 마지막 주인공의 자리에 세움으로써 이야기는 존재의 의미를 다시금 새롭게 조명한다. 이때 문학작품 속 AI는 현실의 AI에게 주로 기대되는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SF 안에서 고유한 의미와 영역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AI가 SF 장르에서 독자적으로 의미를 획득하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이 작품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요소는 작품이 GG를 제외한 다른 로봇 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AI와 로봇을 투박하게나마 구분 지어 놓을 필요가 있다. SF 세계에서 대개 AI는 만들어진 정신이고 로봇은 만들어진 육체다. 그리고 작중에서 비중 있게 등장하는 로봇에는 대부분 GG처럼 AI가 내장되어 있다. 한 개체가 자기만의 고유한 의미와 개성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일단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AI와 로봇이 결합한 인격체가 등장하는 경우에 방점은 로봇으로서의 물성보다 AI로서의 이성에 찍히게 되고, 독자도 은연중 AI의 생각과 감정에 더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AI를 배제하고 본다면 로봇은 한낱 고철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로봇의 몸에 난 상처는 일반적으로 동물의 몸에 난 상처보다 사소하게 여겨지고, 『쥐들 G들』은 그 사실을 너무나도 명백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 속 평범한 로봇 쥐들은 결말부에 모두 화로에 던져져 불에 타버리고 마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이 겉으로 봐서는 보니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동물 쥐와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은 간단히 무시된다. 정말 쉽지 않은가. AI가 플라스틱처럼 편리하면서도 강력한 도구인 까닭은 이처럼 AI와 로봇이 갖는 존재론적 가치에 대한 비대칭적 판단이 많은 독자의 무의식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AI이고, 로봇은 껍데기다. 작가는 필요에 따라 마치 옷을 입고 벗듯 편하게 로봇을 취하거나 버릴 수 있고, 심지어는 불에 태워버릴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작품은 김두경의 『옷산 수색대』(비룡소, 2024)다. 여기 등장하는 AI의 이름은 '아르스(Arx)'다. 눈에 띄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경우, 일반적으로 그 인물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독특한 이름은 독자의 시선을 끄는 강력한 신호이고, 작가는 독자의 시선을 잡아둔 것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아르스의 역할은 미미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건은 주인공 '홍지담'과 '필라', 그리고 '배가영' 세 인물이 각자 가지고 있는 상처로부터 비롯되며, 그들의 관계를 이어주는 매개체로서 '옷산 수색대'라는 게임이 유의미하게 활용될 따름이다. 아르스의 역할은, 말하자면 SF적 느낌을 이따금 양념처럼 가미해 주는 정도다. 아르스가 없어도 이 이야기의 구조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서로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에서 아르스의 쓰임을 보면 AI의 가소성을 새삼 한 번 더 실감하게 된다. 아르스는 지담이가 필요할 때만 잠깐씩 나타나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면서 정작 중요한 사건에는 하나도 개입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초반에 옷산 수색대 게임이 이용자를 기만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던 아르스는, 진짜 위기가 닥쳐올 때는 온데간데없다가 사건이 모두 일단락된 후 천연덕스럽게 나타나 지담이와 함께 결말을 장식한다. 아르스가 인간이었다면 과연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놀랍게도, SF의 플라스틱 신은 이 모든 일을 일말의 이질감 없이 매끄럽게 처리할 수 있다.

요컨대 다른 종이라면 쉬 이해되지 않을 만한 설정들이 AI에 있어서는 느슨하게 승인되는 경향이 있다. 이야기가 그럭저럭 흘러간다면, 작가든 독자든 AI 캐릭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 SF 동화를 읽으면서 그다지 치밀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데에는 아마 이런 내막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을 것이다. 천편일률적으로 감정이 없고, 원론적인 소리를 지루하게 늘어놓는 데다가, 겉보기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그러면서도 속내를 알 수 없게 의뭉스러운 AI들이 줄지어 나타나는 동안, 그리고 작가와 독자가 AI란 으레 그런 것이라고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동안, SF 동화는 어쩔 수 없이 약간 진부해졌다.


Ⅳ. 이제는, 뜸을 들일 시간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AI에 관한 길고 세세한 논의 끝에 남는 질문은 대개 이런 식이다. AI가 작가와 독자의 인지적 비용을 절감해 주는 효과가 있고, 그것의 부작용이 종종 일어난다는 것도 알겠는데, 도대체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

이에 대해 할 수 있는 대답은 우선 천천히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AI란 이러저러하게 작동하는 것이라고 대강 넘겨짚기보다 시간을 들여 정답 없는 고민에 빠져보자는 것이다. 챗gpt처럼 근사한 답을 금세 출력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읽고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한 것들을 떠올리며 부정확한 감각에 기대어 대화를 해보자는 것이다. 원래 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그런 관점을 염두에 두고, 이 글에서 다룬 내용을 종합해 나름의 결론을 내어 보자면 이렇다.

책은 사유를 촉발한다. 나는 이 문장이 참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책은 물질만을 가리키지 않고 책을 둘러싼 모든 행위와 생각과 감각을 아우른다. 이렇게 하면 책은 하나의 사회 현상이 된다. 책을 사회 현상으로 간주할 때 명확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책을 읽는 사람이 책을 읽지 않는 사람보다 언제나 더 많이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책을 읽는 사회는 책을 읽지 않는 사회보다 확실히 더 많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SF 동화로 분류되는 어린이책 역시 예외가 아니다. SF 동화는 어린이라는 사회에 생각을 더해주는 수단이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 현상이다. 그런 SF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무언가가 단순한 관습과 패턴 안에서 일차원적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관측되었다면, 그건 당연히 어린이책 분야에서 활발하게 논의해야 할 사안이 된다. 본질적으로 사유를 촉발해야 할 매개체가 오히려 역동적으로 사유하기를 꺼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런 각별한 인지적 노력 위에서만, 어린이책이란 현상은 의미 있는 발전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SF 동화 속 AI가 최근까지 얼마나 쉽고 편리하게 쓰여왔는지, 그중 일부는 어째서 공허하고 진부하게 느껴지는지에 관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말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이 앞으로도 짧지 않은 시간 지속될 것이라 내다보았다. 동시에 이야기 속 AI가 어떤 방식으로 제 고유한 의미와 영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짚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불확실한 가정과 고민에 알맞게 뜸을 들일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AI 덕에 모든 걸 쉽고 빠르게 처리해야만 할 것 같은 세상이지만, 적어도 이야기 속 AI 앞에선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깊은 생각에 잠겨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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