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소설은 보통 두 가지로 분류한다. 문학의 예술성에 집중한 순수문학, 장르적 양식을 따르는 장르문학.
그런데 여기 중간문학(Middlebrow literature)이라는 용어가 있다. 장르문학의 재미와 양식을 갖춘 동시에, 순수문학에 버금갈 정도로 훌륭한 문학성을 가진 소설.
예를 들면 <해리포터(1997)>, <반지의 제왕(1954)>, <다빈치 코드(2003)>, <눈물을 마시는 새(2003)>, <보르코시건 사가(1986)>, <영원한 전쟁(1974)>, <타이거! 타이거!(1956)> 등. 그 문학성에도 불구하고 순수문학 서가에 없고 장르문학 서가에 있는 작품들.
그래도 예시로 나열된 작품을 보면 중간문학의 설명에 부합하는 만큼 나름 기준을 갖고 있는 분류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름부터 '중간'이라는 어중띤 말이다 보니 실제로는 잘 쓰이지 않고, 그저 웰메이드, 프리미엄 같은 마케팅적 수사로 대신하는 형편이다.
시작부터 중간문학을 설명하는 이유는 당연히 오늘 소개할 소설이 중간문학이기 때문이다.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한국 게임소설의 아버지라는 명성이 있어, 아마 장르문학 좀 읽어봤다 하는 사람이면 제목과 줄거리는 익숙하지 않나 싶다.
"2011년, 백주 대낮에 국회의원이 괴한에게 살해당한다. 수사팀의 형사 장욱은 친구 원철로부터 첨단 온라인 게임 '팔란티어' 속 캐릭터와 괴한이 비슷하다는 말을 듣고 게임 속에서 보다 많은 단서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무의식으로 조종하는 원철의 게임 캐릭터 '보로미어'가 예상에 없던 돌출 행동을 일삼아 컨트롤에 애를 먹는다. 진척이 더디자 형사 장욱은 게임 회사를 급습하고, 살인자의 물품을 빼돌려 조사하는 등 동분서주하지만 오히려 의문의 세력으로부터 강압적 수사 압력을 받고 수사팀에서 제외되고 만다. 그 와중에 원철은 '팔란티어' 안에서 우연히 괴한의 흔적을 발견하고, 수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과연 살인 사건과 온라인 게임은 연관된 것인가?
출처: 리디북스, <팔란티어 -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책 소개, https://ridibooks.com/books/682000198.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팔란티어, 게임중독 살인사건…. 이름이 자주 바뀌었다. 흐릿한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지금은 이미 웹소설 플랫폼에 판타지, 게임소설, SF 태그를 갖추고 있으므로, SF요소가 가미된 게임환타지소설로 보긴 하겠지만, 사실 작가는 스릴러, 독자는 게임 환타지, 혹자는 SF라고 분류할 정도로 관점에 따라 장르가 바뀌는 소설이었다.
숨은 범인을 추적하는 큰 줄기의 이야기에 항상 긴장감을 유지하니 스릴러로 분류해도 맞다.
환타지 게임이 사건 해결의 열쇠이고, 또 게임 내부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갈등과 이야기도 살인사건 추적만큼이나 비중이 크니 게임 환타지로 분류해도 맞다.
가상현실 게임과 뇌신경과학의 기술적인 설명이 충실한 데다, 기술이 사회에 주는 영향이 주제이니 SF로 분류해도 말이 된다.
앞서 말한 세 가지 장르의 요건을 충족시켰으면서도, 셋 모두 단순 소재나 이야기에 맛을 더하는 양념 정도의 부수적인 역할로 쓰이지 않고, 중심적인 요소일 정도로 충실해서 그렇다. 솔직히 굳이 장르를 따지려고 하면 헷갈릴 정도로 균등하다.
그래서 제목도 자주 바뀌었다. 의도대로 작가 의도 그대로 반영하면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소설의 중심사건이 게임 팔란티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므로 팔란티어….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SF로 분류하고 싶다. SF소설은 기본적으로 주제부터 과학기술이 인간사회에 미치는 함의와 고민을 다룬다. 이 소설의 주제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소설에서 등장한 가상현실은 뇌파를 이용한 가상현실이다. 뇌파는 신경과 달리 통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어서 자연히 게임을 하다보면 무의식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런데 이 무의식이 게임 속 사회에서의 경험을 통해 별개의 인격이 된다. 다만 평소엔 표면의식 아래 잠자고 있어 안전하다. 그런데 이 무의식은 표면의식과 기억을 공유하지 않으므로, 오로지 가상세계의 경험과 지식만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표면의식과 무의식이 바뀐다면? 매우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하필 의식과 무의식의 벽은 약한 최면에도 허물어질 정도로 느슨하다.
저런 조건과 질문 아래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일단 이야기의 방향성이 강해 읽고 나면 결론은 하나로 귀결되긴 하지만, 배양된 인격과 표면인격의 교체가 쉽게 일어나는 사회라는 과학에 기댄 사고실험은 소설을 떼고 봐도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또 SF 소설의 필수요소이자 주요 세일즈 포인트는 기술의 재현이다. 예를 들면 <영원한 전쟁>이나 <스타십 트루퍼스>에 등장하는 강화복. 무전기 채널을 치아로 돌려서 조정하는 등의 사용법이나, 머리 뒷부분의 방열핀 관리 소홀로 일어나는 사고나 부상 당했을 경우 해당 부위를 기계가 조이고 잘라내 패혈증을 방지한다는 묘사 같은.
상용화는 커녕 나오지도 않은 기술집약적 제품을 직접 써본 듯 체험수기처럼 자세한 감상을 남기는 것이 SF 소설의 필수요소인데,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또한 그런 기술 묘사에 충실하다. 뇌파로 조종하기 때문에 무의식이 관여한다는 멀티셋 얘기부터 이것저것 많이 나오긴 하지만 내 눈을 끈 건 자이로 마우스였다.
이름답게 내장된 자이로 센서로 3차원 위치를 파악해 컴퓨터의 커서를 움직이는 입력 장치다. 이해를 돕기 위해 현실에서 비슷한 기기를 찾는다면 VR 컨트롤러. 차이가 있다면 VR 컨트롤러는 스틱형이어서 손에 쥐어서 쓰고, 자이로 마우스는 키보드 사용을 방해하지 않도록 손등에 장착해서 쓴다.
여기에 더해 자이로 마우스를 처음 쓰는 사람의 '이것도 명색이 쥐라고 바동거린다'는 사용소감까지.
감동해서 말을 쏟아내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 획기적인 기술은 아니다. 이미 소설 출간 10년 전인 1989년에 미국 마텔사에서 같은 매커니즘으로 작동하는 기기인 파워글러브를 만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트랙볼조차도 낯설었던 당시 국내 환경에서 3차원 마우스의 인터페이스와 상용화를 상상하고, 소설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장면들은 아직도 감탄이 나온다.
이 소설을 얘기하면서 기립박수를 치게 할 만큼 경탄하게 만든 건 바로 복선이다. 소설 창작을 얘기할 때 복선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복선을 제대로 쓴다는 건 정말 어려우므로 어설프게 쓰느니 그냥 쓰지 말라는 얘기였다.
복선은 주인공의 운명을 고정하는 장치이다. 원인과 결과를 확실하게 고정하는 단서로, 그것 외에는 길이 없었다는 증거로 쓰여야만 한다. 단순히 차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역할만 수행한다면 그건 복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범으로 제시할 게 마땅치 않았는데, 그건 다른 소설은 찾기도 힘들고 좀 불친절한 편이라. 그런데 이 소설은 복선 사용이 굉장히 친절하면서도 확실해 소설창작을 배우는 이에게 권하고 싶기 때문이다.
예시를 들자면 너무 많은데, 무료 공개분에서부터 상당량 나온다. 스포일러를 하지 않고 말하기가 너무 어려워 말을 할 수가 없다.
술술 읽히는 책이지만 의외로 진입장벽이 있다.
이런 환타지나 게임 소설이 처음일 경우 예상되는 장벽은 국회의원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확 흥미를 끈 직후 곧장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는 시점. 미스테리 가득한 살인사건으로 시선 확 잡아놓고 수사과정을 밟는 것부터 보여주면서 주인공을 소개하는 패턴이 일반적일 텐데, 현대 한국에서 환타지 게임세계로 넘어가니까.
그리고 환타지 소설에 익숙하다고 자부해도 적응 시간이 필요할 텐데, 이유는 이 소설의 환타지 게임은 요즘 게임과는 생소한 것이라.
예를 들면 퀘스트 개념부터 차이난다. 게임 시스템이 던져주는 마커와 목표를 따라가는 2020년대 현재 독자들이 생각하는 퀘스트와 달리, 소설에서의 퀘스트는 직접 목표와 인원을 꾸려 나아가는 중소규모 원정 임무이다. 전통적인 TRPG의 퀘스트.
이것 외에도 능력치도 인플레이션 없이 낮은 숫자를 유지하고 있어 숫자 1만으로도 큰 차이가 나기도 하고, 자유도와 유저 중심인 점이나 게임보다 역할극에 가까운 걸 보면 당시 주목받은 울티마 온라인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요약하면 월드오브워크래프트 이후의 현대적인 환타지 배경의 게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다는 얘기.
그래도 문단의 정보량이 많은 편이어서 문맥으로 파악하기 쉽기도 하고, 진짜 모를 것 같다 싶은 부분은 설명도 친절하게 해주어서 책 덮고 검색엔진 뒤져야할 만큼 어렵진 않다.
앞서 진입장벽이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한 줄로 요약하면 '요즘 작법서나 강의에서 얘기하는 거랑 달라요.'
초반에 독자가 모르는 걸 설명하는데 문장을 많이 쓰면 안 되고, 문장당 정보량도 적절히 줄여야 하고, 처음에 강렬한 걸로 시선 끌어놓고 장면 확 바꾸면 안 된다 같은 이야기.
그런데 저 작법들, 사실 현대 장르문학을 창작할 때 있어 귀중한 얘기들이다. 요즘 전체적으로 스낵컬처화된다고 하는데, 그냥 출퇴근할 때 슬쩍 훑듯이 보고, 초반에 조금이라도 답답하다 싶으면 바로 버리고 다른 소설을 찾아보기 때문에 요즘 환경에서 작품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개발한 작법이라고 한다. 예전의 독자들은 작가가 창작하는 데 들인 노력만큼의 정성을 들여 책을 읽어줬다고 한다.
한국의 중간문학이 외국만큼 활발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런 독자의 실종 때문이라고.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정작 그 시절 사람을 모르는 데다, 그 시절 책과 지금 책을 비교해본 적이 없어서 섣불리 동의하긴 힘들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런 독자가 왜 없어졌을까. 미디어의 보급으로 일상이 영상매체 중심으로 재편되었기 때문이라고도 말하지만, 파고다 담배 피울 적에도 다들 싼 맛에 극장 갔고, 텔레비전 많이 봤고, 만화방도 다들 많이 갔다. 그냥 그 시절엔 소설을 그렇게 공들여 읽는 사람이 많았던 게 아닐까. 이유는 모르지만 그냥 많은.
누굴 탓하기 이전에, 나부터 책을 정성들여 읽는 사람이 되어야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