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불어를 쓴다. 그리고 나는 불어라고는 봉주, 메르시, 마담 밖에 모른다. 예의 없게도 메르시가 '감사합니다'인걸 이 나라에 와서 알았다. 그래서 길을 물어볼 때나 음식점에 들어갈 때 can you speak english? 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아주 조금만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물론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도 만났다. 이건 딴소린데, 우리가 영어 할 줄 아냐고 물어봐놓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 민망하더라. 왜냐면 우리는 영어도 잘 못하거든. 한국어만 제일 잘하거든. 나도 적당히, 상대도 적당히 아는 것이 편했다. 아무쪼록 그때마다 차근차근 말해준 사람들이 참 감사하다.
파리에 머무른 지 며칠째 되던 날 있었던 일이다.
파리에 왔으니 에펠탑은 봐야 하지 않겠냐며, 밤 11시에 샤이요 궁에서 에펠탑을 보고 집에 가던 길이었다. 우리 집은 뤽상부르 역이어서 2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인적이 많지 않은 정류장에서 나와 언니, 한 부부가 같이 버스를 기다렸다.
아. 비염은 왜 나를 못살게 구는 걸까. 그 정류장에서 코를 15번은 풀었던 거 같다. 코가 어떻게 된 거 아닐까? 콧물이 이대로 가다간 곧 센 강이 되겠는걸? 그런 생각을 하다가,
- 지영아. 파리는 버스정류장 그래픽을 참 잘해놨다. 어디로 가는지 한 번에 알 수가 있네.
라고 언니가 말하길래 노선표를 봤는데, 뭐야! 정말 한눈에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있었다. 우리가 서있는 정류장은 우리 집 정반대로 가는 정류장이었던 거다.
그때부터 비상. 누가 봐도 허둥지둥거리며 우리가 가야 할 정류장은 어디냐고(그 와중에 계속 콧물이 흘렀다. 센 강처럼) 한국말을 계속 내뱉었는데 옆에 있던 마담이 눈치를 채고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 너네 어디가?
- 우리 뤽상부르 역으로 가야 해.
- 그건 저기 건너편에서 타야 해. 저기 보여?
하고 건너편으로 손짓을 하는데 그 와중에 옆에서 남편이
- 너네 재패니즈야?
- 아니. 우리 코리안!
- 오호! 꼬레아! 안녕하세요~
하고 우리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여서 인사를 한다. 그래서 우리도 덜렁대는 와중에 웃으면서 안녕하세요를 이구동성으로 내뱉었다. 남편은 자기 한국에 가봤었다고, 안암동을 안다고 했다.
- 안암동! 나 거기 살아!
마침 언니의 집이 안암동이어서 언니는 토끼눈을 하고 외쳤고,
- 저기 건너편으로 가서 62번을 타면 돼.
하고 마담이 행여라 우리가 모를까 봐, 손으로 노선표를 가리키며 침착하게 알려줄 때,
- 빨리빨리!
라고 아저씨는 짓궂게 말했다. 한국인은 역시 빨리빨리로 통하는지, 우리도
- 땡큐! 빨리빨리!
를 외치며 반대편 정류장으로 무사히 가서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너무너무 은인이라서 떠나면서 그들에게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틈 많고 허점이 많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여행. 여행은 위기의 순간에서 만난 사람들이 함께 완성시켜준다. 불어를 몰라도 무사 귀가하게 도와준다. 그렇기에 여행은 혼자와도 혼자 온 게 아니고, 혼자 해도 혼자 힘으로 한 것이 아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