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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Apr 09. 2023

경기도민이 정신을 안 차리고 살면 곤란합니다.

[노파의 글쓰기] 경의선 막차와 초능력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어제는 간만에 서울 나들이를 했습니다. 대략 반년만의 서울 여행이었습니다. 서울에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기도 사람, 저기도 사람, 정말 손바닥만 한 틈새에도 사람이 있어서 시골 쥐는 눈이 뱅뱅 돌았습니다. 작년까지 38년을 산 곳인데, 경기도 이주 9개월 만에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정신없이 인파를 헤치면서 남쪽까지 내려온 이유는 집들이에 초대받았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의 자취방에는 몇 번 가보았지만, 누군가 정말 내 집이라고 생각하는 공간에 초대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착실하게 살아온 친구는 10여 년간 몇 번의 오피스텔과 임대 아파트 생활을 거친 끝에 마침내 손때가 반드르르해지도록 안심하고 늙어갈 수 있는 내 집에 정착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저를 그 집의 첫 번째 손님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래서 시골 쥐는 아침부터 호랑이 케이크와 오미자 청, 꿀 홍차와 바질과 상추 씨앗을 바리바리 싸 들고 토요일 오후에 서울 한복판까지 내려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임금님 같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관악산을 보면서 스테이크를 써는 오후라니요.. 오랜 시간 분란과 고독과 빈곤 속에서 살아온 인간은 이런 호사가 눈 앞에 펼쳐지면 또 인생이 어떻게 뒤통수를 치려고 이러나, 의심부터 하게 됩니다. 좋은 게 하나 오면 나쁜 것도 하나 오고, 나쁜 일이 하나 생기면 반드시 또 좋은 일이 뒤따른다는, 나름의 인생 법칙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빛은 입자가 아니라 파동이라는 물리법칙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때문에 좋은 게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 상황을 100퍼센트 즐겨야 합니다. 다가올 것을 걱정하느라 지금을 즐기지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그러든 저러든 올 것은 오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도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친구와 먹고 마시고 수다를 떨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8시 반에는 일어나야 했는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 보니 결국 9시 반이 돼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제게 일어난 첫 번째 나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도 아쉽고 저도 아쉬운데, 어떻게 그런 아쉬운 마음을 무 자르듯 딱 끊고 8시 반에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인정이라는 게 쉽게 끊을 수 없다보니 별별 웃기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제게도 물론 웃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오늘 누린 호사에 패키지로 딸려 있던 나쁜 일인 듯 합니다. 저는 홍대역에서 무사히 경의선에 몸을 실은 후 이제 별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안심했고, 마침 빈자리도 있어서 앉자마자 책을 펼쳐 읽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안내 방송에서 다음 역이 한남역이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남, 한남이라.. 한남이면 한강의 남쪽이라는 것인데, 북쪽으로 가야 하는 내가 왜 남쪽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니가 또 꺼꾸로 탄 것이구나.. 제기랄! 저는 정신 없이 지하철에서 내렸습니다. 안 그래도 갈 길이 먼데 이 밑으로 꽤나 내려와 있었습니다. 제 어두운 길눈에 지긋지긋함을 느끼면서 저는 반대쪽 승강장으로 건너갔습니다. 배차 지옥 경의선답게 다음 차는 20분 후에 온다고 합니다. 도착하면 12시 반입니다. 참으로 지겹습니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고, 마침내 전광판에서 열차가 전역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려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배에서 강력한 신호가 전해졌습니다. 비극적인 신호였습니다. 아까부터 속이 좋지 않다고 느꼈는데, 도저히 지하철에서 한 시간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아쉽지만 다음 걸 타야겠다고 생각하고 차편을 보는데, 다음 열차는 새벽 5시 50분에 온답니다. 이 열차가 막차였습니다. 아.. 정말이지 지겹습니다..



그렇게 어젯밤 저는 인간이 얼마나 초인적인 힘을 지닌 존재인지 확인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초능력 하나는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제가 가진 초능력은 바로 한 시간 동안 급똥을 참는 능력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비슷한 상황에 처하시게 된다면 한 번 지하철에 올라타서 자신의 초능력을 시험해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게 여러분의 초능력이 아니라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최고의 오후와 최악의 밤을 보내고 세상의 모든 번민으로부터 해탈한 얼굴로 집에 돌아왔더니 얼마 전에 주문한 택배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온 7천원 짜리 부처님들입니다. Say hello.

성불의 방 완성!


다들 성불하시기 바랍니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067983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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