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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PA Nov 20. 2023

축축한 물고기 같던 손의 기억

[노파의 글쓰기]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밀러 서평




안녕하세요, 노파입니다.


룰루 밀러는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러니깐 “무엇이든 당신이 매일 하는 일. 무엇이든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일, 그것이 아무 의미 없다고 암시하는 모든 신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중요한 것이기를 희망하면서 당신이 매일 같이 의지를 모아 시도하는 모든 일들”이 전부 발아래 산산조각이 난 그 순간에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대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낼 수 있었는지, 룰루 밀러는 그 점이 궁금했습니다.


답은 ‘긍정적 착각’에 있었습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게는 소름 끼치도록 견고한 ‘낙천성의 방패’가 있었고, 그는 그 방패를 앞세워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들을 위해 사람들을 죽이고 거세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으나, 그에게는 놀라운 투지(그릿)가 있었고, 그의 방패는 엄청나게 두꺼웠습니다.


그러나 90년 후, 그는 자신이 ‘부적합’하다고 판단을 내렸을, 어느 라디오 방송 기자에게 철저하게 발가벗겨지고 끌어내려집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책의 모양을 한 작은 경이(더 내셔널 북 리뷰)”라고 하는가 봅니다.

 

설렘과 흥분으로 책을 덮고 나니 제게도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5년쯤 전, 구성작가 일을 하고 3백만 원을 받았습니다. 피디 공채를 준비한답시고 1년 동안 일을 쉰 후 처음 벌어본 돈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그때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했습니다. 바로 성게 국수를 먹는 일입니다. 저는 제주도로 갔습니다. 아침부터 성게 국수를 먹었고, 점심에는 카페에 가서 책을 읽고, 저녁에는 돔베 국수를 먹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유명한 식당이라 줄이 길었습니다. 줄만 길면 괜찮은데, 1인 손님은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장님은 장사꾼이었습니다. 저와 다른 1인 손님을 엮어서 순식간에 일행을 만들어줬습니다. 그때 그녀가 엮어준 제 임시 일행은 예의가 바르고 수줍음이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사장님은 정말 장사꾼이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이 한눈에 마음에 들었습니다. 곱상한 외모에 조심스러운 행동, 낯을 가리지만 6월에 혼자 제주도로 여행을 올 정도의 적극성은 있는 사람. 그리고 놀랍게도 청년은 라디오 작가였습니다. 맙소사! 저는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청하 한 잔 드실래요?”


청년은 뭔가 결심한 듯한 얼굴로 알겠다고 했습니다. 청하 따위에 왜 결심이 필요한가 했더니 그는 술을 잘 마시지 못했습니다. 고작 두 잔에 얼굴이 빨개지는 청년을 보니 저는 더욱 그가 마음에 들어 한 병을 더 시켰습니다. 또 내가 다섯 잔, 청년이 두 잔을 마셨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금새 시간이 흘렀고 이제 자리를 파할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저는 빠르게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청년과 더 놀까 말까.


저녁 9시만 돼도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 이곳에서 청년과 더 놀 수 있는 곳은 서로의 숙소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빠르게 머리를 돌려 5분 후의 거취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당시에도 저는 돌아온 싱글이었고, 우리는 서로가 가진 고통의 무게를 이해하는 방송작가였고, 무엇보다 저는 청하도 해독하지 못하는 유약한 간을 가진 그 청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좋아, 더 놀자.


결정을 내리고는 청년에게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하면서 악수를 청했습니다. 청년도 해사하게 웃으며 손을 맞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손이, 그 아름다운 청년의 손이, 어쩐지 축축한 물고기 같았습니다.


저는 다시 빠르게 생각했습니다. 이 축축한 물고기를 땡길까 말까. 지금까지의 상황을 봤을 때 제가 땡기는 순간 물고기가 끌려올 것임은 자명해 보였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땡기기만 하면 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손안에 있는 것이 따뜻한 남자의 손이 아니라 죽은 물고기 같았습니다.


저는 한동안 말없이 악수를 하며 청년을 보다가 “조심히 들어가세요”하고 청년과 반대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숙소를 가려면 청년과 같은 방향으로 가야 했지만, 땡기지 않았으니 별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피해 주는 수밖에요.


그런 탓에 저는 그날 밤 제주도의 시골길을 한 시간이 넘개 걸었습니다. 마치 허공에 먹물을 풀어놓은 것처럼 사위가 깜깜하여 무서웠는데, 그 와중에 별들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새까만 허공에 엄청나게 많은 별들이 쏟아져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더 전에, 외국의 어느 바다에서, 해안 동굴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심을 모르는 새까만 해안 동굴 안에서 저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공포심을 누르며 구명조끼에 의지해 수면 위에 누웠습니다.


그때 동굴 천장에 박힌 석영 조각들이, 그날 제주도에서 본 별처럼, 온 존재를 다해 반짝이는 것을 봤습니다. 여전히 약간의 두려움은 있었지만, 바다가 감싸안는 편안함과 얼굴로 쏟아질 듯한 별빛에 저는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아름다운 방식으로 존재해도 되는 건가? 혹시 나는 죽은 것인가? 따위의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저는 제주도에서 어쩌면 좋은 인연이었을 수도 있을 물고기를 놓쳐버렸고, 친구는 그런 저를 등신이라고 했으며, 그해 저는 끝내 피디 공채에 붙지 못하였고, 그 이후 오랜 시간을 과로와 불안, 빈곤 속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불행 또한 기운이 쇠해지게 마련입니다. 아니면 이제 저는 웬만한 불행에는 눈 하나 까딱 안 할 만큼 고통에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뭐가 됐든, 저도 룰루 밀러처럼 어떤 열쇠 하나를 얻은 기분입니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고 하늘에서 다이아몬드 비가 내리며 모든 민들레가 가능성으로 진동하고 있는, 저 창밖, 격자가 없는 곳”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말입니다.


여러분,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 처음 본 남자의 손을 땡길만큼 신식 여성이 아닙니다. 그러니깐, 등신이 맞습니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326822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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