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스님이 초대한 장례식

[노파 문학관 : 해남] 39일차. 두륜산 산행 후기

by NOPA

0260409

#1. 두륜산 등산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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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두륜산 종주를 했다. 고작 봉우리 두 개를 찍은 거라 종주라는 말이 부끄럽긴 하지만.


두륜산에선 노승봉, 가련봉, 두륜봉, 세 개의 봉우리를 찍어야 떳떳하게 종주했다고 할 수 있는데, 두륜봉을 못 찍었다. 산행을 오후 1시에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신 한낮의 선명한 다도해 풍광을 시야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내려다볼 수 있었고, 늦은만큼 사람 마주칠 일도 없어서 정상을 오래 독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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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봉우리, 노승봉에서는 일전에 친구가 기부한 초콜릿벵오를 먹었고(오늘을 위해 냉동 보관함) 두 번째 봉우리이자 주봉인 가련봉에서는 방토와 코리안 멸치 두쫀쿠 도시락을 먹었다.


발 아래 대흥사를 보며, 멀리 완도를 보며, 한 시간 동안 느리게 넋을 놓고 먹었는데도 누구도 내 식사를 방해하지 않았다. 세상을 저 아래 두고 700미터 상공의 땅을 독차지한 느낌은 다른 어떤 것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오직 반도의 끝, 해남에서만 충족될 수 있는 최대치의 독점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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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큰 스님이 초대한 장례식

오늘 이렇게 늦게 산에 오른 이유는 느닷없이 네비게이션이 고장났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두륜산에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정비소에서 자동차 바퀴를 교체한 후 바로 영암 월출산으로 향하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카플레이 연결이 끊기더니 네비게이션이 먹통이 돼버린 것이다.


길치에, 초보 운전자에, 핸드폰 거치대도 없는 상황이므로 월출산이 문제가 아니라 정비소에서 문학관에 가는 것도 어려울 수 있었다.


갓길에 비상등을 켜둔 채 카플레이와 씨름했고, 한 시간 반 정도 지났을 때 마침내 연결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미 11시가 다 된 시각이므로 월출산은 글렀다. 그래서 가까운 두륜산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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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에 올 때마다 들르는 천년수(사실은 1500년 된 나무), 그 아래 내 고정석


두륜산에서도 평소라면 등산로에 가까운 대흥사 주차장에 차를 댔을 텐데, 오늘은 30분 정도 더 떨어져 있는 식당가 주차장에 댔다. 이상하게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산책로를 걷고 싶었다. 그렇게 여러 우연이 겹쳐 시간이 늦춰진 덕에 산책로에서 나온 순간 다비식 행렬과 딱 맞닥뜨릴 수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스님의 장례식인데, 행렬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고 주책스럽게 따라가고 싶었다.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은 서로 다 아는 듯했으나 나만 아는 이 하나 없이, 심지어 망자가 누군지도 모른 채 그곳에 서서 타오르는 불길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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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스님이 왜 네비를 고장내면서까지 나를 다비식에 초대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불자에게 우연은 없다. 모든 일은 인연의 결과다.


나는 네비를 고치는데 정확히 1시간 반이 걸려야 했고, 그래서 월출산 대신 두륜산에 와야 했고, 대흥사 주차장이 아닌 식당 주차장에 차를 대야 했던 것이다. 11시 반에 열리는 스님의 다비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불길은 정말 뜨거웠고, 나무도, 스님의 몸도, 광염 속에서 시나브로 소멸해갔다. 사람들은 별로 슬퍼하지 않았으며 어느 정치인은 부지런히 스님들 사이를 오가며 악수를 했다.


누구는 죽어서 육신마저 제거되는 중인데, 누구는 살아서 악수를 하고 출세를 바라고 다비식이 끝나기도 전에 허기를 채우러 공양간으로 발길을 옮긴다. 삶과 죽음이 불길 속에서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3. 귀신 보는 개

두륜산 북미륵암에 가면 법당 주변에 매여 있는 늙은 개 한 마리가 있다. 작년부터 너덧 번 지나치는 동안 내게 한 번도 짖은 적 없는 순한 아인데, 오늘은 요란하게 짖어댔다. 처음 봤을 땐 꼬리를 살짝 치는 것 같더니 갑자기 으르렁거리며 숨이 넘어갈 듯 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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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귀신 보는 개, 오른쪽이 국보인 북미륵암

몇 년 전 무덤이 많은 산을 헤맸던 날, 민가에 내려가자마자 만난 개가 저런 식으로 나를 향해 짖었다. 내 몸에 뭔가 죽은 것이 붙은 게 아닌지 찝찝했다.

설마 스님, 저한테 붙은 겁니까?


그때 내 차 뒷좌석에 소금이 있는 게 생각났다. 아침에 타이어를 교체하는 동안 근처 마트에서 소금을 한 봉지 샀었다. 소금이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괜히 사고 싶은 마음이 들어 집어들었던 것이다. 역시 불자에게 우연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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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은 육신을 소거하고, 산 사람은 소금을 뿌리고.


차에 타자마자 소금을 한 주먹 쥐어서 마구 뿌렸다. 몸에도 뿌리고 차에도 뿌리고, 문학관에 와서도 방 곳곳에 뿌렸다. 스님 사진 앞에 분향까지 해놓고 돌아서자마자 소금을 뿌리는 내가 조금 정 없어 보이지만 어쩔 수 없다. 산 것 사이에 죽은 것이 끼면 안 된다. 썩 물렀거라!


*

오늘 밤에 갑자기 수도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 한 시간이나 단수가 됐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치만 이건 우연이라고 치자. 그냥 단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지.

스님, 불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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