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 1박2일 산행 후기

[노파 문학관 : 해남] 57일차. 지리산 천왕봉 1박 2일 산행 후기

by NOPA


지리산 천왕봉 등산 1박 2일 코스

날짜 : 2026.04.26 ~ 04.27

코스 : 백무동-장터목 대피소(1박)-천왕봉-백무동



KakaoTalk_20260429_202509269_02.jpg?type=w1


#1. 그가 젊어 보이는 이유

해남을 떠나는 날, 우리나라 1호 국립공원인 지리산 꼭대기를 찍고 가기로 했다. 두 달 간의 문학관 살림을 정리하는 것도 괴로운데 1912 미터 상공을 오르겠다니! 그러나 가야 했다. 거길 가야 남도에서의 생활이 마무리가 될 것 같았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마지막 정리를 하고, 괜히 아침체조를 하는 척하며 나를 배웅나와준 교수님과 잠시 수다를 떨었다.


교수님은 일흔의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어 뵈는 분인데, 이별의 선물로 특별히 그 비결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바로, 본인은 스스로를 쉰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두뇌가 정말 그렇게 믿어버린다고 했다.


내게도 스스로를 스무 살이라고 생각하라고 하셨다. 또 오늘부터 노벨 문학상을 탄다고 생각하라고 하셨다. 교수님이 쉰이 됐을 때, 이젠 그냥 교수 말고 대학 총장이 된다고 생각했더니 정말 그렇게 됐다면서.


그래서 엊그제부터 나는 스무 살이고 조만간 노벨 문학상을 탈 예정이다. 그러나 그 전에 천왕봉에서 일출을 본다고 세뇌시키는 게 더 급했다. 두 달 살림 정리는 이삿짐 정리와 다를 바 없어서 벌써 며칠째 잠도 못 잔데다 못 하는 운전을 세 시간이나 했기 때문이다.

KakaoTalk_20260429_202509269.jpg?type=w1
KakaoTalk_20260429_202509269_01.jpg?type=w1
마지막 날 토문재 풍경과 해남의 흙으로 채운 식충이 화분


#2. 백무동에서 장터목 대피소

12시 21분.

정오의 햇살을 정수리로 오롯이 받아내며 산행을 시작했다. 아직 5월도 안 됐지만 한낮의 열기는 몹시 뜨거웠고, 금세 콧김이 사나워졌고, 머리에선 샤워기를 갖다 댄 것처럼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럴 때마다 태양으로 체액을 투석하는 기분이다. 몸안의 오래된 액체ㄱ 전부 땀구멍으로 흘러나오고, 내가 벌컥벌컥 마신 신선한 물로 몸 안을 전부 새롭고 신선한 것으로 채우는 느낌.


체액뿐만 아니라 숨도 낡은 것은 전부 뱉어내고 그 자리로 지리산의 맑은 공기가 들어오면서 몸 안 곳곳으로 정기가 스미는 기분이다. 아주 힘들고 어지러운데, 황홀하다.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진정한 도파민은 몸을 몹시 혹사시킬 때 나오는 법이다. 그러니 산을 타십쇼.

KakaoTalk_20260429_200651393_05.jpg?type=w1
KakaoTalk_20260429_200651393_07.jpg?type=w1
KakaoTalk_20260429_200651393_10.jpg?type=w1
돌길과 흙길, 그리고 반달곰이 나오는 길


#3. 장터목 대피소

오후 4시, 장터목 대피소 도착. 쉬는 시간 포함 총 3시간 40분 걸렸고, 그중 3시간 20분은 조망되는 풍경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아주 힘들었다.


해발 1,653미터 높이에 위치한 장터목 대피소는 한국 건축물 중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곳이어서 '하늘 아래 첫 집'으로 불린다. 천왕봉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어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대피소이기도 하다.

KakaoTalk_20260429_200651393_16.jpg?type=w1
KakaoTalk_20260429_200651393_18.jpg?type=w1
풍경은 장터목에 올라서야 조망된다。


과거에 이곳에 장이 서서 장터목이라고 부르게 됐다는 것을 알고 옛날 사람의 독기에 몸을 떨었다. 산행이 너무 힘들어서 침낭도 못 갖고 오겠던데, 대체 짚신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물건을 싣고 와서 장사를 했을까. 옛날 사람들이 옛날에만 살았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마주치면 안 될 것 같다.


무거운 게 싫어서 도시락도 겨우 구운 계란과 병아리콩을 가지고 온 주제에 햇반을 따뜻하게 데워서 준다니까 냉큼 사버렸다. 식사 내내 김치가 먹고 싶어 눈물이 날 뻔했다.

KakaoTalk_20260429_202509269_05.jpg?type=w1
KakaoTalk_20260429_200651393_21.jpg?type=w1


그와중에 병아리콩은 까마귀에게 뺏겼다. 지리산 까마귀는 깡패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날아와서는 통행세를 낼 때까지 깍깍거리며 시끄럽게 군다. 깃털이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삥을 많이 뜯었는지 알 수 있다.

닭 아니라 까마귀임


장터목 대피소 화장실이 하도 그악스럽다고 소문나서 걱정을 좀 했는데, 별것도 아니었다. 산에 있는 절을 몇 번 다니면, 해발 1600 미터 고지에 이 정도 상태의 변소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수세식 변기를 벗어나 본 적 없는 유약한 문명인들아, 이 정도면 선녀라고. 그러나 한여름에는 끔찍할 것이다.


진짜 문제는 화장실이 아니라 대피소 침실이었다. 담요가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난방도 안 해주는 줄은 몰랐다. 여벌의 옷이라고는 폴리 소재의 반팔 티셔츠와 얇은 긴 바지밖에 없어서 침낭도 없이 그것들을 깔고 누웠더니 바로 한기가 올라왔다. 추워서 한 시간마다 깼고, 이러다 입이 돌아가진 않을까 걱정될 즈음 알람이 울렸다. 새벽 세 시, 덕분에 질척대지 않고 일어날 수 있었다.

KakaoTalk_20260429_202509269_03.jpg?type=w1
KakaoTalk_20260429_202509269_04.jpg?type=w1


식당에서 두유에 오트밀을 말아 아침을 먹고 있는데, 아까부터 어슬렁거리던 젊은 남자가 말을 걸었다.

“단체로 오신 거 아니죠? 개인 플레이하시는 거죠?”


남자도 일출을 보러 가고 싶은데 혼자서는 새까만 산속을 들어갈 엄두가 안 나서 사람들을 따라갈 참이었다고 했다. 나는 남자의 “개인 플레이”라는 말이 너무 싫어서 절대 저 사람하고 같이 가지 말아야지, 하며 오트밀을 최대한 천천히 먹었다.


그러자 남자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갔는지 어쨌는지 시야에서 사라졌고, 그제야 내가 오트밀을 번개처럼 털어 넣으며 식당을 나서려는데 이번엔 초로의 아저씨가 일출을 보러 가느냐고 물었다. “개인 플레이” 같은 말을 쓰지 않는 걸 보니 이 아저씨와는 같이 가도 되겠다 싶어서 함께 길을 나섰다.

KakaoTalk_20260429_202509269_12.jpg?type=w1
KakaoTalk_20260429_202509269_10.jpg?type=w1
그냥 이런 길을 한시간 가량 걸을 뿐이다


#4. 새벽 4시, 천왕봉 가는 길

아저씨는 대구에서 오셨다는데 참 친절하고 참 말이 많으셨다. 괜히 등산화 끈을 고쳐 매며 나는 천천히 갈 테니까 먼저 가시라고 하며 보냈다.


드디어 어둠과 나, 그리고 적막, 셋만 남게 됐다. 이 모든 무리한 일정의 이유가 바로 이 순간때문이었다. 그때, 해남에서, 밤중에 산길 입구에서 차마 들어서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을 때, 내 기필코 밤의 산을 홀로 가보리라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 원을 지리산에서 풀다니, 아찔하고 행복했다.


당연히 무섭다. 그냥 산도 아니고, 빨갱이도, 빨갱이로 몰린 사람도, 빨갱이가 죽인 사람도, 숱하게 죽어 묻힌 곳이 지리산인데, 그곳을 한 새벽에 홀로 걷는다는 게 안 무서울 리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원혼들 틈을 걷고 있다고 상상하면, 무섭다기보단 슬퍼진다. 세상에 신념만큼 무서운 게 없고, 인간은 참 어리석고 불쌍하다. 그러다 하늘을 보면 너무나 아름답다. 어슴푸레 빛이 밝아오는 곳으로 마을의 모습이 비치면 불쌍한 인간들이 아등바등 하루를 시작할 저 공간도 너무나 아름답다.

KakaoTalk_20260429_202509269_14.jpg?type=w1


사실 따지고 보면 밤새 잠도 못 자고 꼭두새벽부터 홀로 산길을 걷고 있는 내가 제일 불쌍한 사람일 텐데, 이곳에서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다 보면 살아 있는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이 샘솟는다.

아, 불쌍한 중생들아, 인생 짧다, 곱게 살아라.

KakaoTalk_20260429_202509269_17.jpg?type=w1
KakaoTalk_20260429_202509269_16.jpg?type=w1
통천문을 건너니 아스라히 여명이 밝아온다


#5. 천왕봉 일출

천왕봉에 도착하니 “개인 플레이” 남자도, 친절한 대구 어르신도, 그리고 우리처럼 조금 미쳐 있는 광기의 등산객들도, 모두 먼저 와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대구 어르신은 어디서 어떻게 포즈를 잡아야 하는지 이리저리 지도하며 내 사진도 근사하게 찍어주셨다. 감사합니다.

KakaoTalk_20260429_202509269_24.jpg?type=w1
1.jpg?type=w1


그리고 나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만 볼 수 있다는 그 일출을 처음 오른 천왕봉에서 보고 말았다. 나의 삼대가 덕을 열심히 쌓았나 보다. 고맙습니다.

KakaoTalk_20260429_203537976_04.jpg?type=w1
KakaoTalk_20260429_203537976_03.jpg?type=w1


프로들은 일출 사진을 와르르 찍더니 뒤도 보지 않고 내려갔고, 나 같은 초짜들은 여운을 좀 더 길게 음미하고 싶어 질척댔고, 무속인들은 방향을 틀어 성모상 쪽으로 내려가더니 제사를 올렸다.


저들은 뭘 빌었을까. 사람들은 이곳저곳에 돌을 쌓으며 뭘 그렇게 비는 걸까. 아무것도 빌지 않는 나로서는 사람들의 부지런한 염원을 볼 때마다 궁금하다.

KakaoTalk_20260429_203537976_05.jpg?type=w1
KakaoTalk_20260429_203537976_08.jpg?type=w1
염원

장터목 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 걸린 시간 1시간 20분. 일출 구경한 시간 40분. 다시 장터목 대피소로 돌아온 시각 1시간 30분.


백무동 코스에선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의 1.7km가 지리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 모든 공간을 최대한 구석구석 눈에 담았다. 태양의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물결처럼 겹겹이 접힌 산들이 점점 웅장한 자태를 드러나는 풍경이 장관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여기서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KakaoTalk_20260429_203537976_17.jpg?type=w1
KakaoTalk_20260429_203537976_18.jpg?type=w1


그런 생각을 한 사람치고 3시간 15분 만에 너무 번개처럼 하산했다. 고도가 내려갈수록 벌레가 들끓었고, 지긋지긋한 세속의 삶이 벌써 시작된 듯했다. 근데 그 진저리 쳐지는 맛이 또 그리웠다. 너무 오랫동안 시골에 있었던 것 같다. 다시 아귀다툼 하러 가야지.


#6. 산에 여자 혼자 가는 거 안 위험하나요?

위험한 순간들이 있긴 하다. 눈빛이 쎄한 남자를 두 번 봤고, 그중 한 명은 정말 풍기는 기운이 사나워서 여기가 내 무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전투 준비를 했다.


그런데, 여자 혼자 다녀서 안 위험한 데가 어디 있나? 우리는 도시에서도 죽고, 낮에도 죽고, 집에서도 죽는다. 살인사건 비율로 따지면 오히려 산이 산 아래보다 더 안전하다. 여자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 는 생각이 오히려 행동을 제약하고 마음을 위축시킬 뿐이다.


그러니 어디든 가고 싶은 곳 있으면 혼자라도 마음껏 다녀라. 어차피 여자들에겐 모든 곳이 위험하고 인간은 원래 죽게 돼 있다. 여자 혼자 다니기 위험하다면 나라에서 치안을 강화할 일이지, 우리가 위축되어 방구석에만 있을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강하다. 허리춤에 칼자루 딱 차고, 건드리면 기필코 불구로 만들리라, 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싸우면 누구도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된다. 살려달라고 빌면 허무하게 죽고, 죽는다고 생각하면 최소한의 한풀이는 하고 죽을 수 있다. 그가 불구로 힘들게 살 거라고 생각하면 죽으면서도 웃음이 나는 것이지.

KakaoTalk_20260429_203537976_22.jpg?type=w1 지리산 고사목。지리산은 죽음도 장관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벌어질 확률은 극히 낮으므로 그런 건 최후에 생각하시고, 지금은 마음껏 다니십쇼. 세상은 넓고 아름답고 감동스러운 순간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게 인간이긴 한데, 또 가장 아름다운 것도 인간입니다. 암튼 산을 가십쇼!

천왕봉 풍경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4268896402

#노파의글쓰기 #어느날글쓰기가쉬워졌다 #글쓰기 #글잘쓰는법 #노파 #김수지작가 #에세이 #문해력 #어휘력 #감성글 #해남여행 #문학관 #입주작가 #지리산 #천왕봉 #장터목대피소 #천왕봉일출 #까마귀 #백무동코스 #지리산1박2일 #등산후기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26화천관산 귀신의 정체와 삿된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