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가 닿지 않는 자리>>
지난겨울 주말 밤,
배달앱에서 새벽 1시에 야식을 주문했는데
30분 안에 음식이 도착했다.
가족들은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주말 밤을 즐겼다.
그리고 그 당연함의 뒤에
누군가의 밤이 깎여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한참 뒤에야 뉴스 매체로 마주했다.
"밤에 일하는 것을 금지하면 되지 않을까?"
그 물음에 나는 동의했다. 누구나 동의한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금지"가 누군가에게는
'생존금지'가 되는 순간이 가능하다는 것도 안다.
야간·새벽배송을 둘러싼 논쟁에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다.
과로사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고,
노동자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는 분명히 정당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간배송 금지”라는 해법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물론 이 말을 꺼내기 전에,
한 가지를 명확히 해야겠다.
야간 노동이
인간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하는지,
나는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밤샘 노동은 생체 리듬을 교란하고,
발암 물질로 지정될 정도로 건강을 위협한다.
또, 과로사의 대다수가 밤 시간에 벌어진다.
그것은 피할 수 있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나는 다시 생각해 본다.
그들 중 상당수는
낮에 이미 다른 일을 하고 있고,
그 소득만으로는 가계를 유지하기 어려워
밤 시간까지 선택한다.
그들은
'선택'이라는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벼랑 끝에서의 결정을 내렸다.
자식의 학원비를 내기 위해,
부모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내일을 살기 위해.
그것을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물을 마신 것을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야간노동은
자발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선택지가 줄어든 끝에서
남은 차선책에 가깝다.
야간배달이나 야간대리 같은 노동은
흔히 '힘들고 위험한 일’로 묘사된다.
그 일을 택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이미 생활의 한계선에 다다른 상태다.
주간 노동만으로는 버틸 수 없기에,
신체 리듬을 희생하면서까지
시간을 더 쓰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야간노동은
문제의 원인이라기보다,
문제가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다는
신호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논의는 종종 단순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위험하니 없애자'
'과로하니 금지하자'는 방식이다.
물론 의도는 보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묻지 않는 질문이 있다.
왜 낮의 노동만으로는 생활이 유지되지 않는가?
왜 가장의 추가 노동은 항상 야간과 같은 극단적인 시간대로 밀려나는가?
왜 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의 사정은 논의에서 빠져 있는가?
야간근로 금지로
전면적으로 과로는 줄어들 수 있다.
동시에 생계의 마지막 선택지를
잃는 사람도 생길수 있다.
그래서 이 문제는
'허용이냐 금지냐’의 이분법으로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다른 접근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을 해본다.
예를 들어,
"주간근무 수입이 부족하다면,
야간근무에 충분한 보상을 더해
야간 노동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하게 만드는 방식은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누군가는 주야간을 겹쳐 일하지 않아도 되고,
총 노동 시간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
힘든 노동에 대해 사회가
그만큼의 보상을 명확히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 사회는 이미 이런 원리를 알고 있다.
위험 작업 수당,
교대근무 수당,
오지 근무 가산 같은 제도는
힘들고 위험한 노동에 대해
비용지불과 제도로 보상해야 한다는 합의의 결과다.
그렇다면
야간노동만 유독 ‘금지’로 논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관리와 보상의 문제를
너무 쉽게
삭제의 문제로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야간근로를 해야 하는 투잡 가장의 문제는
노동 정책 이전에 생활의 문제다.
주거비, 교육비, 부채, 생계 부담이 겹치며
낮의 노동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구조가 되었고,
그 비용을 개인이 몸으로 떠안고 있는 것이다.
이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야간노동만 없애면
문제는 사라지기보다
다른 형태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약자를 사회에서 보호하고 싶다면,
그들의 차선책을 없애기 전에
선택하지 않아도 되게 만들어야 하지 않나?
위험한 선택을 금지하는 것보다,
그 선택이 필요 없게 하는 조건을 먼저 만드는 것이
진짜 보호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보호라는 말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삶이 보이지 않게 밀려나고 있는지를
다시 살펴보자는 제안에 가깝다.
사회적 문제는
종종 선의로 시작되지만,
해법이 단순해질수록
누군가의 현실은 더 복잡한 위험에 처할 수 있다.
간극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논란을 피하는 길이 아니라
논란을 성숙하게 만드는 길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말 없애야 할 것은
'밤에 일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없애야 할 것은
'밤에 일하며 위험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그들의 밤을 빼앗기 전에,
밤에도 안전하게 숨 쉴 수 있는
진정한 보호장치가 먼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모든 선택지를
존중하는 사회의 시작이다.
**이 글은 전문가의 논평이 아닌 개인의 소박한 의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