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열심히 충족시켜 줬다.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 뭘 하고 싶다면 즉각 반응했고 일사천리로 알아봐서 필요를 채워줬다. 어쩌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게 사랑인 줄 알았다.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 아이가 넷이더라도 각자 결핍이 없도록 가려운 곳을 잘 긁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각자의 재능을 발굴해 원하는 대로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게 지원해주는 누구보다도 훌륭한 엄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방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내가 사랑받고 있다'라고 충분히 느끼지 못하나 보다. 며칠 전 딸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엄마랑 샤워도 같이 하고, 어렸을 때 동영상 보니 내가 씽씽카 탈 때 엄마가 까르르 엄청 웃어줬는데 이제는 나 보고 잘 웃지도 않고. 엄마 웃음이 사라졌어. 동생만 예뻐하고."
그래, 막둥이 낳고 나서는 사랑과 보살핌이 어린 아이에게로 집중되면서 큰 애들 세 명이 나의 주 관심 밖으로 상대적으로 밀려난 적이 많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딸 아이에게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아이들 하나 하나씩 불렀다. "너희들도 엄마의 사랑이 부족하니?"
큰 아이, "엄마가 동생들 보살피느라 나는 방치된 적이 많아. 하교하고 집에 와서 엄마 보고 싶은데 동생들 데리러 가거나 놀이터에 가 있는 적이 많고. 동생들만 없었더라면 나만 사랑해줬을 텐데."
둘째 아이, "형은 첫째라 애지중지해주고, 셋째 딸은 딸이라고 봐주고, 넷째는 막내라고 다 봐주고 나만 가운데 껴서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아." 눈물이 고인다.
막둥이, 덩달아 울기 시작한다. "나는 유치원 가기 싫은데 엄마가 유치원 날마다 보내서 싫어. 엄마는 나를 싫어하나봐."
'총 맞은 것처럼'이라는 가요도 있는데 노래의 제목처럼 가슴에 총을 맞은 듯 하다. 모두가 나를 공격하는 듯 하다. 아이들 마음을 보듬어 준 다음, 나도 펑펑 울고 말았다. "엄마 있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그 이상으로 너희들한테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줬어."
재능을 면밀히 살피고 관심 영역을 확장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해주는 것과 온전히 사랑해주는 것은 다른 문제인가보다. 사실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못했다.
나도 어쩌면 우리 엄마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해줬을까? 한 치의 모자람 없이 나를 지원해줬던 엄마, 그런 엄마에게 성인이 되서 퍼부었던 생각이 난다. 유년 시절 내내, 아니 평생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꼈다. 엄마의 사랑은 왜곡됐다고 느꼈다. 회한이 든다. 엄마는 엄마 위치에서 세 아이 키우며 셔터맨 아빠를 두고서 혼자 돈 벌면서 가계를 이끌며 최선 이상의 삶을 살았는데 엄마가 가장 아꼈던 나에게 그런 말을 듣고 얼마나 가슴에 비수가 꽃혔을까?
마음에 기쁨과 사랑이 모자란 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인생에서 정말로 길을 잃었을 때는 성경과 기도로 돌아오게 된다.
마음이 슬프다. 기도한다. "저에게 타인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을 주세요."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로마서 9장 2절-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