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한 달 여행기|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중앙시장: 이거 사세요!

by 북유럽연구소

자그레브에 왔다.

어느 나라든 수도는 볼거리가 많겠지만 사실 여행자로서의 나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조사형 인간이 아니다. 여행까지 와서 왜 바빠야 하느냔 말인가. 일정은 하루에 한 개면 족하다. '꼭 가야 할 곳!'으로 미리 계획해 놓은 곳이 없는 이상 그날 그날이 선사할 우연에 맡긴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 하며 전날 인터넷으로 찾아보거나 현지에서 어디를 가면 좋겠냐 물어 한 두 군데 찾아다니는 게 일정이다. 그러다 보면 곁길로 새기도 하고 길을 잃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하루가 간다. 누가 들으면 속 터질 일이지만 매번 그랬어도 늘 즐거웠기 때문에 특별히 바꿀 이유도 못 느낀다.


자그레브는 수도니까 좀 돌아봐야지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사실 플리트비체에 가기 위한 동선이기 때문에 들렀다. 일단은 시장을 좋아하는 엄마를 모시고 중앙시장인 돌라체 마켓에 갔다가 그다음은 뭐... let's see where our today's fortune takes to.


중앙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를 정했다. 9월 중순이 지났지만 아직 늦여름 날씨. 나오기 전 지도를 검색해 대강 가는 길을 보고 나왔다.


한참 걸었는데 시장이 안 보여서 지나가던 행인(멋쟁이 중년 신사)에게 중앙시장 어떻게 가느냐고 물었다.

"저기 멀리 보이는 첨탑 있지? 그쪽으로 쭉 가면 돼. 나도 그쪽 방향이니 같이 갑시다."

"엄마, 이 아저씨도 그쪽으로 간데. 같이 가면 된데."

아저씨와 어디서 왔냐, 어디 가봤냐, 맛있는 카페 어딨냐... 등등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엄마는 옆에서

"향수도 어지간히 진하게 뿌렸네. 제비처럼."

"아나운선가? 목소리는 참 좋네. 목소리 좋다고 해라."

등등의 코멘트를 해왔고 나는 적절하나 수준으로 바꿔 전달해가며 세 블록을 같이 걸었다.

"나는 여기서 우회전이고, 두 분은 왼쪽으로 쭉 가다 보면 광장이 나올 겁니다. 시장은 그 뒤편이에요."


동상이 있는 광장에서 사진 두어 장 찍고 계단을 올라섰다. 눈부신 햇살 아래 널찍하게 펼쳐진 시장의 활기, 화려한 색감! 보는 순간 맥박이 좀 빨라졌다.

"엄마 과일 사 먹자!"

"그래 무화과랑 복숭아랑, 어머 저기 벌 붙은 거 봐라."

파리가 아니라 벌이었다. 새빨간 수박에 까맣게 달라붙은 벌. 과일이 엄청 단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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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신이 나서 복숭아를 하나씩 사다 옆에 수도에 닦아서 베어 물고는 걷고 있었다. 단물이 입가에 주르륵. 맛있는데 흉해ㅎㅎㅎ 햇살이 좋아 그런가 과일이 다 맛있어 보인다.


"무화과 맛보세요!"


엄마랑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머 한국 분이세요?"

자그레브 시장에서 한국어를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네, 무화과 맛보세요. 여기는 친구네 가게예요.

자그레브에 온지는 몇 년 됐어요. 나중에 한국 식당 차리려고요. 말도 배울 겸 나중에 장 볼 때 어디가 좋은가 물건도 보고 파악할 겸 시장에 와서 사람들 사귀고 있어요. 이 친구네 집에서는 말린 생강이랑 브라질리안 너트 사가시면 좋아요."

엄마는 멀리 와서 한국 사람을 만났는데 뭐라도 팔아줘야 한다며 이것저것 물건을 보기 시작했다.

"저는 여기서 받는 거 하나도 없어요. 이 친구가 정말 착해요. 그래서 말 배우려고 자주 와요."


아무 조사 없이 온 나를 위해 하늘이 보내준 천사인가.

엄마는 생강 1kg이랑 너트 500g랑 무화과 6개까지 야무지게 골랐다. 아놔 여행은 이제 절반인데 어떻게 들고 다니자고. 하는 나의 생각은 나의 생각일 뿐이고 엄마는 방금 만난 자그레브 전문가에게 활기를 띠며 물었다.

"여기 잘 아시겠네요. 그럼 여기서 뭐 사가면 좋아요?"

"꿀이요! 여기 꿀이 엄청 좋아요."

"아 맞네. 아까 수박에도 까맣게 붙어 있더라. 파린 줄 알았는데 벌이더라고. 과일도 저리 달고 벌도 많으니까 꿀도 진짜 좋겠네."

"그럼요. 여긴 설탕 같은 거 안 섞어요. 제가 잘 아는 집 있어요. 거긴 물건 떼 오는 집이 아니라 직접 양봉하는 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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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엄마와 나의 손에는 소나무 꿀, 도토리 꿀, 라벤더 꿀, 벌집이 통째로 들어있는 꿀이 각 1병씩 들려있다. 꿀 사려고 광장까지 다시 내려와 ATM에서 돈도 뽑았다. 돌아와서는 겨울 내내 향긋한 꿀물을 마시며 무거워도 좀 더 사 올걸 그랬나 싶기도. 장을 보는 동안 자그레브 전문가님은 시장 사람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젊은 사람이 대단하네. 뭐라도 대접해야지. 차나 한 잔 할래요? 그나저나 어떻게 자그레브에 살게 되셨어요?"

자그레브 시장에서 만난 한인 사업가님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Tip! 자그레브 시장에서는 이걸 사자!

말린 생강, 소나무꿀, 도토리꿀, 라벤더꿀...그리고 과일 많이 사먹기!


소나무꿀로 꿀물 한 잔 타먹으니 향긋하고 화~한 소나무 향이 나서 너무 좋다. 도토리꿀은 밤꿀 비슷한 맛, 라벤라꿀은 감기예방에도 좋다고. 여행 내내 저녁마다 엄마랑 도란도란 그날의 재밌었던 일 이야기 하면서 꿀물 한 잔씩 마셨다. 행복이란 이런 것!?

살 땐 무거웠는데 한 병 더 살걸 싶은 녀석. 한국에선 찾아볼 수가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