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양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제야 좀 알겠네
키에르케고르 평전(마음의 철학자. 클레어 칼라일 씀)을 읽고 있다.
덴마크 사람이라 전부터 관심은 있었는데 이 사람이 말하는 철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딱 잡히지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산파법 말고도 기존제도와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든지, 개인의 깨달음과 윤리를 강조했고
플라톤의 이데아며 군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논증법과 윤리,
헤겔은 정반합 뭐 이렇게 하나라도 잡히는 것이 있는데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이니 절망이니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해대니,
예를 들어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실질적으로 무거운 짐이 되는,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도 아무런 대가도 따르지 않는 노동이 되는 그런 방식으로 진리에 봉사함으로써 참회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p.332)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는 분?? 새벽 두 시에 술 먹고 SNS에 썼다가 아침에 화들짝 놀라 지울법한, 어디에 올려놔도 아무도 안 읽을 소리를 주저리주저리 써놓았으니 몇 번을 읽어도 이 양반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지금도 그다지...)
키에르케고르의 책이 세상에 나왔을 때 엄청난 인기를 모았고 코펜하겐 곳곳에서 그의 책을 주제로 대화할 정도로 화제였다던데, 것도 믿을 수가 없다. 처음엔 번역의 문제인가 했는데 키에르케고르의 모든 책이(적어도 내가 찾아본 몇 권은) 다 그러니 번역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아마 코펜하겐에서 가장 좋은 저택에 사는 곱상한 청년이 세기의 사랑처럼 굴던 약혼녀에게 파혼을 선언하고, 우수에 찬 표정으로 매일 시내를 나다니다 어느 날 책을 냈다고 하니(초기에는 익명으로 냈지만) 나름 그 시대의 유명인사라서 주목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가 쓴 책에는 약혼녀 레기네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평생 풍랑이 그치지 않는 그의 마음속 고민과 비유는 모두 레기네를 향한 것, 그녀가 알아봐 줬으면 하는 간절함이 담겨있다. 죽기 전까지 레기네를 마음의 연인으로 여기며 레기네게에 주었던 반지를 끼고 심지어 유산까지 레기네에게 남겼다. 그런데 왜 헤어지냐고. 세상 답답한 양반, 아마 INTP일 듯. 심지어 레기네는 결혼도 했는데. 민폐캐릭터. 밤새 집에 틀어박혀 글 쓰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일부러 낮에 눈에 띄는 시내 중심가 카페를 드나들었다는데...피곤한 스타일이시네. 저기요...사람들은 타인에게 그 정도로 관심을 갖지 않아요.
키에르케고어의 책은 크게 심미적(그의 표현)인 책과 종교적인 책으로 나뉘는데 후반기에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과 고민을 많이 썼다. 기독교에 대한 그의 답이 흥미로왔는데,
"신은 선한데 왜 그가 창조한 세상은 악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가"에 대한 신학자들의 고민에
신앙의 과제는 고통을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더불어 삶을 영위하는 것이라며,
그 스스로도 위기의 시절에 "왜 나는 이런 고통을 당하는가?"를 고민했지만 결국 "어떻게 이 고통을 겪어 나갈 것이가?"를 묻는 것이 가장 절박하고도 실존적인 물음이라 결론지었다.
그가 쓴 책의 제목만 봐도 <이것이냐, 저것이냐(Enten-Eller)>, <공포와 전율(Frygt og Bæven)>,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 <죽음에 이르는 병(Sygdommen til Døden), <저 외톨이> 죄다 우울과 불안, 세상과의 분리...키에르케고르에게 실존이란 그저 고통을 직면하는 것.
몇몇 종교지도자가 고통받는 이에게 행복한 결말을 약속하는 것은 그저 손쉬운 위안이며 속임수 같은 것이라며, 이는 고통을 이겨나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달래는 것일 뿐, 이것은 세속적 지혜이지 종교적 위안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아브라함이나 마리아를 예로 들며 불안 속에 있는 자만이 평안을 찾을 수 있다고 축복과 저주의 양면에 대해 말한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인물은 비탄과 고뇌를 면제받은 이들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철저히 겪은 인물이다. 자신이 맞닥뜨린 삶의 현장에서 시련과 맞서는 이들이며 영적인 삶의 가장 큰 적은 공포, 예수가 제자들에게 "두려워 말라"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p.115)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어 남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할 때는 자신이 이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라는 우울한 생각에 빠지기 쉽다. 그러 때는 하나님 앞에 모든 이가 똑같이 중요하고 무조건적으로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어떤 차이가 있다면 가장 심하게 고통을 겪는 이가 하나님의 애정에 가장 가까운 대상이어야 할 것이다.(p.355)
성경에는 왕도 나오고 고위관리도 있지만 그들은 처음에 목동이었고 노예였다. 장사꾼도, 거부도, 가난한 농부, 과부, 창녀, 어부, 세리 그 시대의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직업군이 등장하지만 성경에서 신에게 인정받는 인물의 유일한 공통점은 지성도 선함도 아름다움도 아닌 믿음, 어떤 상황에서도 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고통가운데 꿋꿋이 매달리는 것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부유한들, 권력과 명예를 자랑하는 인간의 허세와 줄 세우기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뒤집어보면 신 앞에서는 어떤 조건이나 스펙 없이 믿음 하나면 된다니 이 얼마나 은혜로운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위험, 곧 자기를 상실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아주 조용히,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일어날 수 있다. 다른 어떤 상실도 그처럼 은밀하게 일어날 수 없다. 사실 세상에서는 이런 정신적 부주의함이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의 편안함으로 보인다. 자기를 상실함으로써 그런 사람은 일과 사회에서 훌륭하게 해 나갈 능력을, 이 세상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은 셈이다. 여기에는 어떤 꾸물거림도 어떤 어려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흐르는 돌처럼 순조롭고, 빙글빙글 도는 동전처럼 원활하다. 그는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는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서 인간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이 견해는 잘못되었으며 아이러니다. 이런 세속적 견해로 인해 더 높은 정신적 소명을 거부하는 것이다. (p.138)
절망을 강조하는 것은 음침하고 우울한 견해려 생각될 것이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무언가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을 조명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인간의 가장 고귀한 요구, 정신적으로 존재하라는 요구의 운명아래 서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너무 복잡해서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사색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단순한 삶의 정수를 누리며 사는 것이 사치처럼 여겨진다.
때론 일과 사업에 집중하며 자신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계속 머무르며 감각적 범주 안에 육체로만 사는 것을 선호할 수도 있다. 인간의 가장 고귀한 요구가 정신을 고양하며 영혼의 본질로 존재하는 것임에도.(p.140)
결국 이 양반이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으니 이를 받아들이고 직면하자는 것.
절망과 우울 가운데 자신의 정신을 들여다보게 되니 고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며
세상의 기준에 따라 육체로 사는 것이 아닌
가장 고귀한 존재, 즉 정신으로 사는 것이 실존이라는 것.
그렇다고 스스로 고통을 선택하며 살 것 까지야.
p.s.
쇠렌 키르케고르의 책은
자신의 머릿속을 생중계하다 보니 어려울 뿐 아니라 별 재미도 감흥도 없는데
도대체 이게 뭔 소린가 싶어서 놓지 못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