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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서 Jun 14. 2019

쏟아져라, 이야기야


쏟아져라, 이야기야

글. 김해서




내가 살던 그 동네도 내려다보면 십자가가 많았지. 아이를 내다 키우기 무서워 엄마가 날 가둬 길러야 했던 만큼 형편없는 사람들이 살던 동네였지만, 그들도 기도하며 하루를 사는 사람들이었을 테지.



유월. 아직 시원한 저녁일 때, 유일하게 하나 있던 밝은 가로등 불빛 밑으로 옹기종기 모여 앉던 동네 사람들. 대부분 노인과 중년 여자들이었고 막걸리나 값싼 과일 등을 꺼내 먹던 모습이 생각나.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모르겠어. 난 너무 어렸거든. 기억 안 나. 더러운 쥐와 굶주린 고양이들은 들었겠지. 지붕을 타고 다니던 좀도둑들과 칼을 갈던 강도놈들도 들었겠지. 몰래 짐을 싸 그 마을에서 도망가던 여자들도.



난 상황 기억력이 좋은 녀석이라 그래도 그걸 모조리 잊을 리가 없는데, 동네 사람들이 얘기하던 것 중 하나라도 기억할 텐데, 남아 있는 게 없는 걸 보면 아마 그때 마음이 두둥실 떠 있었나 봐. 우주에 혼자 두둥실. 등속직선운동으로 서서히 멀어지는 무력한 몸뚱이처럼. 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거든. 그 동네에서 살던 꼬마라곤 나랑 내 동생밖에 없었거든. 우리 엄마가 제일 젊은 여자였으니 말 다했지. 밤은 시원했지만, 심심했어.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습한 종아리에 달라붙던 은박지 돗자리. 가로등 밑으로 달려들던 엄청나게 많은 나방들. 내 머리를 땋아 내려가며 수다를 떨던 엄마의 손길. 그리고 늦은 밤이 되어 사람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때, 엄마와 나도 어둠을 더듬으며 단칸방으로 갔어. 다들 장님처럼 조심히 걸어 집으로 갔지. 그땐 고양이가 참 무서웠는데 말이야.



난 가난을 버텨본 적 없어. 가난 속에서 태어났던 아이일 뿐. 지금에서야 어린 시절이 다시 보여. 봐야 하는 순간인가 봐. 퐁퐁, 내 시야를 가로막고 눈 안에 장면들이 차올라. 적어야 하나 봐.



예전엔 글이 나보다 멋있기를 바랐는데, 지금은 그냥 글이 나였으면 좋겠네. 처음부터 시작해야지. 아니, 처음을 살아야지. 글로, 마음으로. 그러니 사람들이 문장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나를 봐줬으면 좋겠어. 기특하게 여겼으면 좋겠어. 그럼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천천히 다시 자라서 겉만 커진 이 몸을 꽉 채울 때까지. 멈추지 않을 수 있어.



어린 시절의 내 미움과 사랑, 내 심심한 상상들과 외로움. 그때 그 부산 집을 보러 가는 길. 이젠 씩씩하게 그 골목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부엌도 거실도 방도 아닌 그곳에 대자로 누워 낮은 천장을 보며 웃어야지. 그리고 나직하게 거는 주문.



쏟아져라, 이야기야. 다리 위로 툭툭 떨어지던 바퀴벌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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