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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서 Jan 24. 2024

[책]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려면, 본 대로 느낀 대로

박완서 산문집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려면,
본 대로 느낀 대로


자아성장 큐레이션 플랫폼 '밑미'에서 리추얼 메이커로 지낸 지 9개월 차. [하루 한쪽 외면일기] 커뮤니티를 운영하면서, 내면의 수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이들이 일기를 쓰며 시선을 외면으로 돌리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지긋이 지켜볼 수 있었다. 가까운 데서 먼 데로 점차 나아가는 글은 어떤 명상서적이나 에세이보다도 훌륭하고 아름다운 지침처럼 다가오곤 했다. 시선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만 갇혀 있던 에너지가 친구, 반려견, 애인, 직장동료, 사물, 가족, 음식, 창작물, 자연과 같은 바깥으로 뻗어가 '새로운 행동까지' 취하는 분을 만날 때면... 그런 감동이 또 없다. 


나를 둘러싼 것들을 제대로 인지한다는 것은 생엔 '붙들 수 있는 밧줄'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밧줄'은 한 사람에게 어제는 떡볶이였다가 오늘은 철 모르고 핀 꽃, 내일은 모르는 개가 될 수 있다. 하루하루 외면의 조각들을 기록하다 보면, 세계의 친절함과 이상함, 아름다움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지루한 걸 넘어서서 때론 징글징글하기도 한 '나에게 귀속된 시공간'이 잘 가꾼 뜰처럼 아늑하고 정겹게 느껴지기도 하는 기적도, 어떤 날엔 찾아온다. 


그래서 '외면일기'는 이따금 게으르게 쓸 순 있어도 포기할 수는 없는 리추얼이었다. 세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으로 나 자신과의 화해로 닿는, 몇 안 되는 기회이니까.


같은 의미에서 산문집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는 마치 박완서 작가님 버전의 '외면일기'를 읽는 것만 같았다. 계절, 이국의 풍경, '밤'이라는 시간대, 글을 쓴다는 것, 시골과 도시 문명, 현대인의 이기심, 기성세대의 눈으로 바라본 젊은이, 여자와 남자의 차이, 편견. 이런 주제들을 다루지만 결코 '안전'하거나 '온건'하기만 한 태도로 얼버무리지 않는다. 애정과 냉소, 관대와 불관용 사이를 넘나들며 솔직하게 본 대로 느낀 대로 기술한다. 글 안에서만큼은 당신의 체면이 망가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 보였다. 사나운 아줌마였다가 너그럽기 그지없는 할머니였다가 완연한 문명인이면서도 향토적인 삶을 놓지 못하는 이중적인 삶의 양식을 갖췄고 명랑했다가 울적했다가,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그저 사람'이었다. 


세상에 대한 애정은 너무나도 뜨겁고, 통찰은 놀라울 정도로 서늘하다. 그 커다란 온도차가 한 사람의 목소리로 귀결된다. 타협하는 마음으로는 결코 쓸 수 없는 글이 있다는 걸 알게끔 한다. 박완서 작가님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겉치레하듯 쓰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박완서 작가님이 바라본 '외면' 세계. 산문 안에 들어선 그 세계가 지금까지도 뜨겁고 서늘한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는 건, 주어진 삶을 아주 뚫어져라 쳐다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가 작고한 지 20년이 넘었고, 우리 공동체 안에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그의 철학이 독자들에게 주는 울림이 유효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피로감을 느끼고 인간이 사랑을 느끼고 인간이 좌절하고 인간이 희망하는 모든 순간에 대한 예민한 포착.   


수록된 모든 에세이의 뉘앙스가 따뜻하지 않았어도, 이 책을 덮고 나서 '커다란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우리를 대신해 집요한 시선과 꾸밈없는 감정을 표현해 주었기 때문이겠지. 모르고 싶은 것을 안 보는 사람이 아니라 그럼에도 계속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저마다 다른 인생을 살아온 독자들의 '땁땁한 가슴'을(본 책 '답답하다는 아이들'에서 가져온 표현) 품어주며 긁어줄 수 있었겠지. 철저하게 박완서 작가님 개인의 이야기였어도,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그 간극을 잊고 자연스럽게 공감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둘러보게 한다. 당신이 희망을 심을 수 있는 세계의 귀퉁이, 각자의 외면을 살피도록 한다.  


나도 그러고 싶다. 삶에 대한 내 사랑이 무게로 느껴지지 않도록, 본 대로 느낀 대로 더 다가서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다.




무엇보다도 나에게 남겨진 자유가 소중하여 그 안에는 자식들도 들이고 싶지 않다. 내가 한사코 혼자 살고 싶어 하는 걸 보고 외롭지 않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 나는 순순히 외롭다고 대답한다. 그게 묻는 이가 기대하는 대답 같아서이다. 그러나 속으로는 '너는 안 외롭냐? 안 외로우면 바보'라는 맹랑한 대답을 하고 있으니, 이 오기를 어찌할 거나. (p.59)


휴가라는 명목으로 여행을 갔다 오면 더욱 피곤하고 짜증스러워지는 것은 관광 인파와의 부대낌 때문만은 아니다. 가도 가도, 심지어 산간벽지까지도 골고루 걸레처럼 널려 있는 문명의 쓰레기와 상업주의 때문에 이 땅에서 도시적인 걸 벗어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인식한 어쩔 수 없는 결과였을 것이다. (p.81)


이렇게 점점 파인 플레이가 귀해지는 건 비단 운동 경기분야 뿐일까. 사람이 살면서 부딪치는 타인과의 각종 경쟁, 심지어는 의견이 차이에서 오는 사소한 언쟁에서까지 그 다툼의 당당함, 깨끗함, 아름다움이 점점 사라져가는 느낌이다. (p.166)

                     

외형적으로 보통 사는 것으로 보이되 의식은 부자지향적인 수가 많다. 그래서 뱁새가 황새 쫓는 식으로 끊임없이 부자의 상태를 흉내 냄으로써 자기 생활을 파탄과 불안으로 몰고 간다. 속으론 혹시 가난해지면 어쩌나 불안한 채 겉으로 호기 있게 부자의 흉내를 내면서 산다. 일종의 분열 상태다. 보통 살면서도 보통 사는 데 대한 긍지나 줏대가 없다. 이건 진정한 의미로 보통 사는 게 아니다. 정말로 떳떳하게 보통 사는 사람은 드물고, 따라서 보통 살기가 외롭다. 보통 사는 사람이 많아야 의사소통이 잘 되는 건강한 사횔 텐데 말이다. (p.259)


박완서,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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