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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서 May 09. 2024

[제목없는일기] 00. 아직도 들어가며


그러나 그런 내게 ‘약간의’ 위로가 되어준 책을 어느날 만나게 된다. 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어떤 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매일 큼지막한 공책에다가 글을 몇 줄씩 쓰십시오. 각자의 정신상태를 나타내는 내면의 일기가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람들, 동물들, 사물들 같은 외적인 세계 쪽으로 눈을 돌린 일기를 써보세요. 그러면 날이 갈수록 여러분은 글을 더 잘, 더 쉽게 쓸 수 있게 될 뿐만 아니라 특히 아주 풍성한 기록의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미셸 트루니에, 『외면일기』 p. 125



‘이 정도의 방향성이라면, 나도 이미 충분히 해내고 있었지!’ 하며 쾌재를 불렀다. 다음은 2023년 3월 7일 기록이다. 이건 심지어 수첩, 메모 앱도 아니고 폴더 없이 방치된 구글 문서에 적혀 있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미국으로 이주한, 뉴욕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이자 시인인 ‘오션 브엉’의 시집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를 발견했다. 사회경제 전문용어를 제외하고도 내게 낯선 단어가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기쁘다. 재빨리 국어사전 창을 띄워 검색한다. 타륜. 한자로는 舵輪. ‘손잡이가 달린 바퀴 모양의 장치. 배의 키를 움직이는 데 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뱃사람이 되거나 뱃사람과 결혼하지 않는 이상, 살면서 내가 이 단어를 육성을 내뱉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배의 키를 조정하는 조타수에겐 지겹도록 따라붙는 단어일인데, 도시에서 프리랜스 글쟁이로 연명하는 인간에겐 시집에서나 볼 법한 단어라는 게 묘하다. 말 하나를 새롭게 안다는 것은, 나 밖의 세계를 어렴풋이 짐작하는 신비한 열쇠를 얻는 것과 같을지도.




2020. 04. 11 무렵엔 토마토에 빠져 있던 모양이다.




요즘 토마토가 너무 좋다. 방울 말고, 크게 한 입 베어물 수 있는 사이즈. 베리류 과일처럼 예쁜 녀석들도 아니니 흐르는 물에 힘차게 씻어도 된다는 게 맘에 든다. 맛은 또 어떠한가. 달달하다가도 뒷맛이 시큼짭짤해서, 혀 뿌리부터 턱 신경까지 찌릿찌릿하며 침이 폭죽처럼 터진다. 비몽사몽한 아침 혹은 집콕 생활에 지쳐 무력한 날, 잘 익은 토마토만큼 강력한 충전제가 또 있을까. 매일 아침, 아빠는 찐 토마토에 올리브오일을 둘러 먹는다. 몸에 좋다며 엄마가 하도 닦달하는 통에 먹기 시작했는데, 벌써 몇 개월씩 하루도 빼먹지 않고 챙겨드신다. 생토마토 특유의 매력적인 풋내는 못 느끼겠지만, 아빠의 조리법도 썩 괜찮을 것 같다. 내일 먹을 토마토들이 냉장고에 있다.  




나는 이미 미셸 트루니에가 말하는 형식의 글을 쓰고 있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 정도의 틀 안에서라도 제대로 써봐야 하지 않겠나? 드디어 ‘일기’에 한 뼘 가까워진 것이 조금 기뻤다.(더니 일기장은 끝내 마련 안 하고, 수첩과 핸드폰 메모앱, 구글 문서 등을 오가며 또 마음대로 적었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운의 흐름을 탄 것인지 ‘밑미meet me’라는 온라인 리추얼 커뮤니티로부터 리추얼 메이커(커뮤니티 호스트 개념)로 함께해 줬으면 한다는 제안을 받는다. 그들의 첫 제안은 ‘시’와 관련된 리추얼이면 좋겠다는 쪽이었다. 


하지만 나는 무모했다. 시인 지망인이란 케케묵은 타이틀을 두고, 초짜 일기러로 리추얼 메이커에 도전하고 싶다고 선언한 것이다. (무지성 핸들링을 보고도 흔쾌히 박수쳐 준 밑미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그렇게 ‘일기장 하나 없는 자의 일기 리추얼’은 [하루 한 쪽 외면일기]라는 멋드러진 이름으로 탄생했다. 나는 내가 호스트라는 사실이 리추얼 오픈 당일까지도 믿기지 않았으나, 초반의 우려와는 달리 1년 가까이 순탄히 지속했다. 『외면일기』에서 차용한 관점을 적용해 커뮤니티 멤버들의 쓰기 습관을 독려하려 애썼고, 나 역시 매달 아주 높은 인증률을 달성했다. 


왜 그렇게까지 힘을 들였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멤버를 돕는 것이, 그들이 자신의 기록을 차곡차곡 기록이 쌓아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내게 큰 자극이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독려하는 역할 정도로 머물렀어도 됐으나, 리추얼 메이커로 첫 발을 내딛는 결심을 했을 때보다 더 더 ‘잘’ 해보고 싶어졌다. 


1년의 시간이 지나자, 나는 완전히 일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1년의 시간이 지나자, 나는 일기 쓰는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1년의 시간이 지나자, 나는 『외면일기』를 ‘내 것’으로 만들고픈 강한 욕구를 느꼈다. 

1년의 시간이 지나자, 일기로 내가 갈 수 있는 끝까지 가보기 위해서는 내 기록물의 이름을 새로 붙여줘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돌아왔다. 제목 없던 나의 기록으로. 


외면을 수집하듯 기록하는 일기를 넘어서서, 내가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쓴, 내외면을 아우르는 지난했던 기록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시 같은, 고양이가 생길 미래의 어느 날을 기원하는, 빽빽한 내면을 살피는, 세상을 관찰하는, 내가 뱉을 수 있는 가장 투명한 글. 목적 없이 쓰여서, 태어나자마자 쓸모를 잃은 글들. 이것은 나의 ‘일기’였음이 분명했다. 망각해버렸지만, 아주 환한 날들이었다. 


스스로 인지하지도 못 했고, 어떻게 일기를 써야 하는 지도 몰랐으나 나는 이미 쓰고 있었다. 


그리하여 또 무모해져보려 한다. [제목없는일기]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제목없는일기]가 제목을 만날 때까지, 나는 내 일기에 이름을 붙여주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문인과 예술가들의 일기 사례를 찾아 나설 것이다. 일기를 쓰려 들 때마다 느꼈던 높은 벽과 의심들을 더 적극적으로 마주해볼 생각이다. 리추얼 메이커로 활동하는 잠시간 동시대 사람들의 일기를 목격한 경험 역시 이 프로젝트에 유효한 양분이 되어주리라.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마음이 너무 앞서나가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일기를 ‘잘’ 쓰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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