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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에 대한 글을 쓰기 전부터도, 나는 내가 쓴 <제목없는일기>의 정체에 대해 고민한 적 있다. 물론, 고민이라기엔 바람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지나가듯 생각한 것은 다음과 같다.
이것은 내가 읽는 나의 생존 신고.
살아가던 사람이 살아있음을 툭 알리는 신호.
툭, 툭툭, 툭, 투둑…..
(이날의 그 여자는 아직 살아있을까?)
생각이 글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을 보면, 나는 또 노트북으로 원고 작업을 하다가 딴생각을(아마도 이 일기에 대한 생각) 했거나 아니면 배고파졌던 게 분명하다.
비비언 고닉은 『상황과 이야기』에서 말한다. 자전적인 글을 쓸 때, 반드시 쓰는 이는 ‘상황’과 ‘이야기’를 구분해야 하고, 상황에서 뜯어낸 ‘이야기를 말하는 페르소나’를 창조해야 한다고. 논픽션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야기 없이 상황만 나열된 글은 화려한 묘사나 남다른 감응으로 채워질 순 있으나, 그것이 읽는 이에게 유의미한 통찰과 감정적 경험으로 가 닿진 못한다는 것을 여러 문인들의 에세이를 예시로 들며 설명한다.
내가 그간 각종 메모장과 수첩, 구글 문서에 적은 <제목없는일기>는 당연히 이야기가 아니다. 무수한 상황의 연속에 가깝다. 때문에 ‘1일의 나’와 ‘2일의 나’는 어조, 신념, 기분 등의 조건만 놓고 봐도 완전히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이다. 그간의 기록을 쭉 읽어봐도, 삶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조차 명료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제목없는일기> 속 나는 어쩔 땐 ‘시’에 미쳐있다가 ‘시’를 경멸한다. ‘가족’을 끔찍이도 생각했다가 진짜 ‘끔찍하게’ 여기기도 한다. ‘산책’은 계절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감각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는가 싶더니, 세상 돌아가는 꼴이라면 보기도 듣기도 싫다며 자신을 불러내는 무엇이든 들이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투우가 되어 있기도 하다. ‘일’을 맡기는 클라이언트에게 발등 키스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절규한다.
한 마디로, 읽을 가치가 없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 여자에게 정나미가 털릴 뿐이다. 언젠가 브라이언 무어의 소설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을 보고서, 몽상적이고, 침울하고, 의지박약에, 사랑과 희망이 많지만 그것을 다루는 데 어리숙한 인물인 주디스 헌에게 치를 떤 적 있다. 그녀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다니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인정한다. 내 <제목없는일기> 속 화자는 그녀보다 더 지독하고 체신머리 없다.
그래서 이 기록을 ‘생존 신고’라고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 툭툭, 먼 곳에서 도달한 생존 신고라 이해한다면 티끌만큼의 선심을 발휘해 봐줄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구했다가는, 나는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비명을 지르는 불쾌한 여자를 구원해야 하는 중책을 맡고 말 것이다. 그건 싫다. 난 언제나 무엇이든간에 내버려 두고 싶은 쪽이니까.
그렇다면, <제목없는일기>는 이야기가 될 수 없었던, 재고 쌓인 물류 센터에 불과한 것일까?
“사람들이 우는 이유는 아주 다양하지. 누군가 죽었을 때.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 그리고… 더는 참을 수가 없을 때.”
“뭘요?”
“상처받았는데도 살아가야 하는 게.”
-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1988)>
언젠가 영화 속 의미심장한 짧은 장면을 숏폼 영상으로 공유하는 SNS 계정(@audiovisualmaterial)에서 본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가 책이었다면, 그래서 언젠가 이 작품을 읽어 내려가다가 이 대목을 보았다면, 그 대목에 가로막혀 그날은 더 읽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 머물렀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대단한 인사이트로 다가온 건 아니다. 우리의 대단치 않음이 새삼 너무도 대단하여 그랬으려나.
아무튼 ‘상처받았는데도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은 이미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우리는 평소 (상처받았는데도) 보다는 (살아가야 하는) 쪽에 방점을 찍으며 무지성으로 견디는 존재라는 것을, 여기까지 읽어 내린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그러나 (상처받았는데도)에 방점을 찍는 쪽이라면?
어쩐지 그쪽 사람들은 일기 쓰는 사람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며 상처받는 순간들은 ‘상황’이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쪽’을 선택한다면, 그게 누구든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빚기 위해, ‘상처(상황)’라는 재료를 들여다보는 눈을 가진 자.
일기 쓰기는 바로 그 ‘자격증’을 매만지는 일인지 모르겠다.
‘나’의 자격
그렇다면 그 자격증이란 무엇일까. 에세이나 회고록, 칼럼 등지에서 등장하는 공적인 ‘나’와는 다른 ‘일기 자아’에겐 어떤 자격이 부여될까. 사전적 의미로 치면, ‘자격’은 특정 신분이나 지위를 뜻한다. 그런 맥락의 신분과 지위는 한 사람의 일기를 몇 편만 읽어봐도 대충 짐작 가능할 것이다.
김해서 (2024년 5월 기준)
한국 나이 30세 미혼 무교 여성
프리랜서 글쟁이 (에디터, 에세이스트, 시인 지망인이라는 정체성이 있지만 본인을 먹여 살리는 건 90 프로의 지분으로 에디터 역할)
마이너스 인생 (낭비해서가 아니다. 글쟁이에게 책정되는 소소한 페이 + 전세대출… 때문이다!)
남도 출신(부산~광주)이고 10년째 서울 시민
8년 교제한 연인이 있다
INTP, O형, 염소자리, 블라블라...
가족 관계: 양친 모두 건강하며 남동생이 있음
내 소개를 대충 해 보았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든 부릅뜨든 유의미하거나 특색 있는 정보가 없기 때문에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수준으로는 에세이나 회고록, 칼럼의 한 줄 정보는커녕 SNS의 아무 말로도 쓸 수 없을 거고, 내가 평소에 체면을 관리할 사회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만 적나라하게 보일뿐이다.
그러나 일기에는 스스로 마음껏 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 심지어 나는 위의 정보를 싹 무시한 채, 새로운 존재를 꿈꾸며 뭔가를 쓴 적도 있다.
2021. 08. 21
독립적인 가족. 엄마와 아빠도 따로 살고, 내겐 언니가, 내가 잘 있는지 궁금해하는 언니가 있어. 술도 잘 마시고, 민소매와 쪼리, 담배를 사랑해서 모으고, 하늘색 아이섀도를 칠하고 다니고, 의외로 자주 울지 않아… 그리고 내겐 이제 시 말고… 시 아닌.
2023. 01. 30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자존심 상한다. 고양이일 수도 있었던 거 아냐?
<제목없는일기>는 이름에 걸맞게 무슨 의도로 적었는지 알 수 없는 무턱대고 쓴 글이다. 이 두 기록에서의 ‘나’는 현실의 나와 불화하고 어떤 지위와 신분의 사람인지 특정할 수 없다. 평행우주의 김해서가 될 수도, 고양이가 될 수도 없다. 말 그대로, 지금 주어진 것에 위반되는 기록들이다.
그러나 한 장의 베일만 벗기면 알 수 있다. ‘나’에게 가족과 시, 눈물은 특별한 의미라는 것. 그리고 인간의 어떤 면을 경멸하고, 고양이를 사랑한다는 것.
노트북에 비밀번호를 설정하거나 문서를 잠가두거나 아예 노트북을 숨기는 식으로 내 일기를 보호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귀찮은 일을 감수할 만큼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나에게 일기장은 비밀이 담긴 보물 상자가 아니다. 그건 단지, 모든 것이다. 어쩌면 일기에 나 자신이 드러나지 않도록 숨기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나는 누가 내 일기를 읽건 말건 신경 쓰지 않는다.
- 세라 망구소, 『망각 일기』 p.24
세라 망구소처럼 나 역시 <제목없는일기> 안에서만큼은 나를 의식하지도 드러내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애초에 타인이 볼 거라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심지어는 나조차도 다시 읽지 않았고), 누군가 기록을 발견했을 때의 반응도 그려본 적 없다. ‘지금 이 순간’ 말고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미 모든 것이 있다. 너무나도 모든 것이기 때문에 탄로 나든, 기록이 말하는 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하룻밤만 지나면 상관할 일이 아닌 것이다.
앞서 언급한 사회적 의미로서의 ‘자격’은 일기장 안에서 힘을 잃는다. 다만 일기 앞에서 우리에겐 ‘나’, ‘가장 지금의 나’로 살 수 있는 자격증이 매일 생긴다. 그것의 유효기간은 길면 하루, 짧으면 기록을 마치는 바로 그 순간에 만료되곤 한다.
일기장은 재고가 쌓인 물류센터가 아니라 내 삶이 고갈되는 동안 한쪽에 비축하는 ‘초초분분의 나’가 저장된 곳, 씨드볼트가 될 수도 있다. 숨긴 씨앗을 다시 꺼낼 확률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건, 우리는 일기장에도 거짓 정보나 자기 현실을 기만하는 내용을 적기도 한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과 미래를 살아내는 강인한 생명과는 상관없이.
망한 혹은 망할 운명을 염려하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상처받았는데도 살아가야 하는 자기 자신을 마주할 것. 주어진 상황을 자유롭게 선택해 재조립하고, 그것을 꾸준히 혹은 간헐적으로 기록하는 주체로 남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발화되는 지점에 매 순간 놓이는 것. 그러나 이야기의 절정이나 결말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 연습을 하는 것. 어제의 사랑과 어제의 좌절에 관여하지 않고, 늘 새로 쓴 페이지에서 절규하고 노래하는 미친 사람이 될 것. 상황인듯 이야기인듯, 스타카토로 이어지는 음악처럼. 그것이 <제목없는일기> 속 자아의 자격이었을까.
어쩌면 나의 이 일방적인 기록물은 현실 원리나 타인의 영향을 덜어낸 ‘홀가분하고 무책임한 자기 자신’을 만나보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