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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서 Apr 14. 2023

진짜 이유

『비법한자』 넷째 날

한자공부를 시작한 첫날, 이 공부를 시작하게 된 건 가족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때 비슷한 말을 반복하는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것도 이미 충분한 이유인데 내심 더 큰 내적 동기를 품고 있었다. 시장의 언어가 내 일상 언어 및 창작 세계를 점령하려 한다는 강한 불쾌감이 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바로 이게 한자 공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더 큰 계기였을 수도 있다.


'불쾌함'이라는 노골적인 표현에 누군가는 좀 껄끄럽게 볼 수도 있겠지만, 내 얘기를 들으면 조금 공감해주지 않을까 싶다. SNS나 유튜브 등에 장시간 노출되고 나면 내 언어 세계가 도떼기시장처럼 정체불명의 기원을 알 수 없는 편의상을 위한 언어들로 가판대 전면이 채워지는 기분을 받곤 한다. 원래의 나였다면 앞에 있는 것들을 헤집어 가장 뒤에 놓인 '진짜'를 꺼내 흡족해할 텐데, 날이 갈수록 '진짜' 위에 쌓이는 '유사 언어'가 많아져서 초장부터 의욕이 꺾이곤 한다.


말 한마디를 골라 쓸 때마다 사용료(?) 지불을 위해 정말 지갑을 열어야 한다면 내 성격상 '아이템' 대신 '물품'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을 것이다. '화이트 파이톤 백' 대신 '흰 뱀피 가방'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향수'라는 말이 있는데 '퍼퓸'을 굳이 쓰려하지 않을 것이다. 외래어와 외국어를 박멸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다. 난 그런 걸 주장하는 쪽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시장에서 비롯된 말들의 영향력이 너무 세서 내가 실제로 잘 쓸 수 있는 다른 말과 다르게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를 억제하게 될 때가 많아졌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와다 요코가 쓴 <여행하는 말들>을 읽다가 아주 반가운 구절을 마주했다.

"멋있는 여성을 타깃으로 한 라이프스타일 토탈 브랜드로 지난 시즌에 데뷔하고 컬렉션 2회째가 되는 올해는, 마루노우치에 있는 새로 오픈한 숍에서 컬렉션을 개최. 블랙 양가죽 셔츠, 샤프한 벨벳 슈트와 코트, 옷깃이 넓고 드레이프가 풍성하 드레스 등 질 좋은 소재를 사용한 심플하고 우아한 스타일을 발표했다." 같은 문장이 아무렇지 않게 흘러넘친다. 가타가나가 가장 많이 들어간 말은 상품명과 그것을 장식하는 형용사다. 내용물을 모르는 외래 상품을 고마워하는 소비자의 어리석음을 이용해 신제품을 팔려고 외래어를 쓰고 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즈보라'나 '슷폰' 비슷한 오래된 느낌의 발음이 재미있게 들리기 시작하는데, 이를 멋대로 '팬츠'로 바꿔 부른다. 백화점 점포에서 그런 말을 쓰는 것은 자기 마음이지만 이젠 소설에서까지 그렇게 쓰지 않으면 이상하게 됐다. 백화점 방침을 왜 소설이 따라야 하는가.


필요하다면, 나는 시를 쓸 때 외국어나 사투리, 미신적인 용어 등 표준적이지 않은 단어도 지면에 끌어온다. 그러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이미 나란 존재는 문화적으로도 사상적으로 혼재된 인간이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부산과 광주라는 남도의 양극을 다 경험했고 지금은 서울 시민으로 산다. 사고방식이 서구적이면서도 아시아적이고, 한국어가 모어이면서도 출처를 모르는 외국어를 섞어 쓴다. 돈을 추구하면서도 돈에서 벗어난 인생을 살고 싶기도 하다. 특별히 자랑스럽게 주창할 만한 신념이 있지 않아서 이쪽 진영 저쪽 진영 할 것 없이 모두가 이해되지만 다 이해하기 싫은 순간도 많다. 이토록 나란 개인은 복잡하다. 


그런데 언어는 어째서인지 그만큼 풍만해지기는커녕 갈수록 단순해진다. 나이기 때문에 나 같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두루두루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만 쓰려고 하는, 편향성이 감지된다. 실제로 나는 프리랜서 에디터로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기획하고 표현한 기사가 매체를 접하는 일반독자의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고 누가 봐도 체감하기 쉽기를 바란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세운 나만의 기준이 흐릿해지고 타협이 쉬웠다. 굳이 흠잡을 일은 아니지만, 점점 습관이 굳어져 일이 아닌 상황에서도 타성에 빠져든다는 게 문제다. 그야말로 위기다. 코어근육 없이 하는 운동이 몸을 상하게 하듯, 중심을 잃은 언어생활 역시 여기저기 잡음을 일으킨다. 언어는 영향력이 세서 정확하지 않거나 뭉뚱그리면 원래의 의도가 반절도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한자를 익히고 싶었다. 기계처럼 학습된 말을 뱉기보다는 말의 무게와 영향력을 제대로 알고 뱉고 싶다. 내가 나서서 '우리 모두가 언어 습관을 성찰해야 한다'라고 주변 현상을 통제할 능력은 없지만(그럴 능력이 있다고 해서 통제해서도 안 되고) 나 스스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다. 나는 일단 내게 짜증이 난 상태다. 지나치게 고지식해질 필요는 없다 해도 내가 범한 언어적 방만을 깨닫고 숙연해질 건 있다. 그래서 구도(?)하는 자세로 한자를 배우고 싶다. 동아시아 내 역사적 분쟁과 강력한 문화 기류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만큼 내 결심이 나쁠 것도 없다. 


배우고 싶은 이유가 이러니 앞으로가 마냥 즐겁진 않을 건 눈에 훤하다. 심지어 우리말엔 한자어가 매우 많고, 한자는 그때그때 새로운 의미가 필요할 때마다 계속 생겨나는 거라 정복이 불가능하다. 그냥 계속하는 수밖에.


호기롭게 이유를 주절댔으니 이 동기를 외면할 자신도 없다. 나는 한자 공부를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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