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법한자』 셋째 날
다시 한자 공부 리추얼.
요즘 컨디션이 저조하다. 그렇게까지 무리한 것 같지 않은데, 외출하고 돌아오니 어이없을 정도로 몸도 마음도 방전되어 있다. 한자를 할 게 아니라 몸 공부를 해야 할 판국이다. 어쨌거나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엉덩이가 한다고들 하지 않나. 일단 책상에 앉았다. 앉으면 뭐라도 하겠지 싶어서. 그러나 뭘 했다기엔, 오늘의 내 뇌는 마치 방수 기능이 생긴 것처럼 흡수율이 떨어진다. 쓰는 행위가 손끝에만 머물다 사라진다. 그 사라지는 감각에라도 집착하듯, 한 획 한 획 따라 적으며 펜이 미끄러지는 느낌을 그냥 따라갔다. 한참 전에 단물이 다 빠진 껌인데, 하도 오래 씹어서 관성적으로 질겅질겅 물고 있는 것처럼 진전이 없다. 오늘 내 공부 온도는 미지근.
고작 3획 자 부수를 본 게 다다. 갈 길이 구만 리라 한숨이 나온다. 그렇지만 장거리 레이스를 뛰겠다고 결심했으니까 억지로 몸을 이끌어 본다. 『비법한자』는 상용한자 1,800자를 다루고 있다. 난 아직 1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계속 출발선(부수 공부)에서 몸을 풀고 있는 셈인데, 몸이 천근만근이다. 괜히 시작했나, 하는 마음이 두둥실 떠오르는 순간 머리를 흔들어 깨운다. 한자를 시詩처럼 생각해 보면 어떨까. 무수한 신춘문예 낙방의 경험을 떠올려 보는 거다.
시는 백지에서 출발한다. 아무도 내게 출발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데 일단 냅다 시작하고 본다. 시야말로 정말 먼 길을 통과하는 과업이다. 걷고 헤엄치고 가만히 머물렀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결승선까지 달려버리는. 나만의 호흡으로 달리는 레이스다. 그렇게 쌓인 시간을 모아 투고하면 떨어졌고 다시 응모하면 또 탈락했다. 그런데도 계속하고 있다. 며칠 전에도 모 문예지에 시 열 편을 제출하고, 5월에 응모 마감인 한 출판사 신인상에도 도전하려고 준비 중이다. 이젠 햇수를 세기도 지겹다. 그냥 그것이 내 리추얼이다. 공모전과 별개로, 좋아하는 일러스트 작가님과의 콜라보 작업을 위해 '파랑 Blue'와 관련된 시적인 단상을 수집하고도 있다.
내게 시는 취미가 아니다. 공부다. 무엇에 대한 공부냐고 물어온다면, 대번에 답할 수 없지만 '공부'가 맞다. 내가 말하고 내가 들어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상한 말에 대한 공부다. 시는 특정 사회와 특정 문화권의 언어를 빌려 쓰는 행위지만, 국경과 성별과 시공간을 초월한 내 안에 기거하는 단 한 명의 인간에게 집중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나는 그 사람의 소리를 듣고 받아 적는다. 그 사람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수년을 썼는데 여전히 완벽하게 통역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항상 간발의 차로, 혹은 너무나도 멀리 뒤처진 채로 시를 쫓는다. 기어코 닿으리라는 기약도 없지만.
그러나 뒤처진 길 위에서 털레털레 앞으로 걸으며, 나 들으라고 혼자 지껄인 말들이 좋았다. 부끄러운 말도 있고 너무 갔다 싶은 말도 있었지만, 그 순간이 참 좋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공부'에 소질이 아예 없진 않은 사람일 것이다. 정신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에 직면하는 것만큼은 근면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 한자 공부도 길게,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도 길게 이어가면 될 것이다. 포기하지만 않고, 털레털레 가보기란 식은 죽 먹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