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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서 Apr 04. 2023

부수도 잘 모르지만

『비법한자』 둘째 날


공부 리추얼 두 번째 날.


『비법한자』를 펼쳐 부수를 살폈다. 부수란, 글자를 볼 때 길잡이 역할을 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글자의 부분을 말한다. 획수별로 여러 부수가 분류되어 있는데, 17획이나 되는 것도 있다. 17획이나 되는 게 어떻게 한자의 부분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두 페이지밖에 안 되는 분량이지만 오늘 한 번에 이 모든 것을 살피는 건 부담스러워서 1~2획 자 부분만 보기로 했다. 뭐가 묻은 건지, 유독 이 페이지의 오염도가 상당하다.


부끄럽지만 1획자에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갈구리 궐'이라고 하는데 대체 갈구리가 뭔지 모르겠는 것이다. 검색해 보니 '갈고리', '갈퀴'를 뜻한다.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갈고리를 갈구리라고도 불렀다는 사실을 오늘 알게 된다. 동식물 화석을 보며 정체를 유추하는 기분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과장일까. 마찬가지로 '안석'이 '벽에 세워두고 앉을 때 몸을 기대는 의자형 방석'이었고, '비수'는 예리한 칼을 뜻하는 비수 외 '수저'의 의미도 갖고 있었다. 내 또래 사람들은 웬만하면 모르는 말일 것 같지만, 안석이나 비수라는 표현이 굉장히 고아하고 멋스러워서 언젠가 시어로도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반가웠다.


이번엔 손으로 써보기도 했는데, 굵은 선으로도 써보고 얇은 선으로도 써봤지만 한자는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 써봐서 그런지 모양새가 영 엉망이다. 한자 공부를 훨씬 먼저 시작한 동생에 따르면, 한국인마다 자기만의 한글 글씨체가 있듯이 한자도 이리저리 써보며 자신에게 꼭 맞는 글씨체를 찾아내면 이후의 암기는 훨씬 더 수월해진단다. 그 말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아직 나와 펜과 한자는 서로 내외하는 중인 것 같다. 붓펜을 사볼까?


중학생 시절, 학교에서 한문 수업을 주에 한 번씩 듣긴 했지만 사실 기억나는 건 거의 없다. 깜지 벌칙을 수행하는 기분으로 한자노트를 가득 채우는 과제를 했던 것만 떠오른다. 지금 내 한자 글씨체는 퇴화하여 그때보다 훨씬 못생겼지만, 마음만큼은 가볍다. 나는 줄칸에 맞춰서 깔끔하고 논리정연하게 필기하는 법을 모른다. 줄이 보이면 언제나 갑갑함이 먼저 밀려들어왔다. 선을 넘으면 안 될 것 같고, 덜 채우면 어쩐지 공간이 낭비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글쓰기용 메모장을 구매할 땐 줄 노트는 배제한다. 시를 쓸 때도 노트북으로 옮기기 전까지 아무것도 없는 백지 위에 낙서하듯이 군다. 지금은 지금이고, 당시의 나는 한문 선생님에게 "드로잉북에 쓰고 싶은데요."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그림을 그리듯이 이리저리 줄과 칸을 넘나들며 한자를 익혔다면, 나는 그 행위를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이제 속 편한 방식으로 한자에 접근할 수 있으니, 이 공부의 흥망성쇠는 순전히 내 책임이다. 노트 탓도 선생님 탓도 할 수 없다. 물론, 나는 내 탓을 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사람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한자 공부는 공부이면서도 그림(상형)을 익히는 것이니까 최대한 이것을 좋아해 보고 싶다. '백지 위에 조그맣게 그리는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특별하니까.



그리고 『비법한자』를 조금 더 애정하게 된 계기가 생겼다. 바로 책의 뒤 날개에 새겨진 추천사 파트 때문이다. 추천사가 뭐 별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 책을 추천하는 지식인들 이야기 아래에 가정주부, 대학생, 고교생의 추천글도 있다. 엄근진한 사진들도 너무 귀엽다. 이 평범한 사람들이 『비법한자』로 한자 공부에 흥미를 붙여서 정말 언어 상식을 많이 쌓았을까? 문득 요즘 출판시장에도 이런 식의 추천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책을 잘 읽고 이미 뭔가를 빠삭하게 잘 아는 권위자나 유명인의 말 한마디보다,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이 책이 어떻게 다가갔는지를 보면 더 와닿을 것 같다. 적어도 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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