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법한자』 첫째 날
오늘, 첫 공부 리추얼 시작.
오전 11시. 아버지가 물려주신 책 『비법한자』를 펼쳤다. 아버지가 고등학생에서 대학생 시절 내내 펼쳐보았을 한자익힘용 교재다.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월의 흔적이 적나라게하게 느껴지는 누런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오래된 지폐에서 나는 냄새 비슷한 게 코끝을 자극한다.
이 책은 사실 동생이 먼저 본 책이다. 그렇잖아도 많이 낡았는데 어떤 페이지는 제본 상태가 좋지 않아 까딱 잘못하면 뜯어질 것 같다. 조심히 다뤄야 한다. 동생은 일어와 중국어를 독학할 때 이 책을 썼고, 옛날 책 치고는 읽기도 편하고 내실 있다며 내게 추천했다. 기본 부수와 각 한자마다의 획 순서와 육서(六書)에 따른 글자의 모양 분석 및 해설, 그리고 해당하는 유사 영어/일어 어휘 등이 함께 기재되어 있어서 좋다고. 대학 졸업 이후로 공부와 한참 멀어진 누나가 약간은 한심해 보였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종종 내 입으로도 "점점 멍청해지는 것 같아"라고 말하는 일이 잦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의 pool이 넓은 편이었는데 점점 내 자원이 고갈되고 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내가 늘 사용하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어떤 관념을 표현해야 하는데, 그에 해당하는 어휘가 다양하게 떠오르지 않아 매번 비슷한 말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한자를 많이 알면 조어 능력이 생길 텐데. 결국 모어를 더 깊고 풍부하게 경험하기 위해서는 한자어 이해가 필수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독서는 죽어도 싫다면서 한자는 많이 알고 있는 동생이 나보다 더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순간도 가끔 있다.
그러나 나는 뭐든지 뭘 시작하기 전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머릿속으로 무수히 시뮬레이션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방법론을 말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시를 써야 한다고 해보자.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내가 원하는 조도로 환경을 조성한 다음 오후에 내내 곱씹었던 시적 장면이나 단어들을 노트북 흰 화면에 나열하는 그 장면을 그린다. 그 장면 속에 있는 내 모습이 부러워져야만 서재로 달려간다.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본격적으로 작업하기보다는 핸드폰 메모장이나 메모지에 끼적끼적 써보고 구상하는 정도에서 그쳤던 것 같다.
아마 이번 공부 리추얼도 그럴 것이다.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아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도 상상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은 첫날인 만큼 교재와의 아이스브레이킹이 먼저였다. 들어가기 전, 편집진의 서문과 한자의 기원 및 관련 상식 페이지를 쭉 훑었다. 80년대 책자라서 딱딱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친절하다. 게다가 그 당시에도 오늘날 못지않게 '청년 세대의 어휘력'을 염려하고 탐탁지 않아 하는 기성 지식인들이 많았다는 게 흥미로웠다. 어느 시절이나 배움의 정도를 두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들이 많았구나.
나는 그 당시 청년들에 비하면 한자에 있어 까막눈 수준이겠다. 꾸지람조차 듣지 못할 그야말로 백지. 그래서인지 첫날부터 한자의 매력을 알 것 같다는 거짓말을 못하겠다. 단지 이 책의 오래된 색, 냄새, 촉감, 옛날 문체에 호감이 좀 생겼다. 젊은 아빠와 동생을 거쳐 내 손으로 들어온 이 책은, 사실상 역대 가장 나이 든 사람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내일도 한자를 바로 익힐 마음은 없다. 기본이 되는 부수부터 살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