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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진 Sep 28. 2017

로마, 로망스 / Ep. 01

[끝나지 않는 한 밤의 이야기]














떼르미니

- 숙소로 가는 길




공항에서 테르미니로 오는 열차 안에선 차표 확인이 한창이었다. 얼마 전 여행 블로그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이렇게 차표를 일일이 확인해도 열차 안에선 집시들이 우리의 짐을 노리고 있단다. 그러니 자나 깨나 자신의 짐을 잘 지키라는 것이었다. 열차에서 잠이 오다가도 알람처럼 뇌를 때리던 그 한 문장 때문에 나와 내 트렁크는 맘에도 없는 눈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눈싸움이 피곤하게 느껴질 즈음 떼르미니 역에 도착했다. 위에선 기차가, 아래에선 지하철이 다니는 역사 안에서 바삐 이동하는 행인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또 최근 난민문제와 유럽 내 크고 작은 테러들 때문인지 무장군인들이 테르미니 역을 순찰하고 있었으니 긴장되기도 했다.





맥도날드가 로마에 되는대로 비집고 들어온 흔적이 역력하다. 유적지 때문에 내부 인테리어를 깔끔하게 손보지 못해서 곳곳에 바위더미와 흙에 묻혀있는 기둥들을 유리막으로 간신히 덮어두었던 것이다. 역시 이 곳은 파면 유적과 유물이라던 말이 우스갯소리가 아님을 맥도날드가 증명하고 있었다. 플랫폼에 서자 지하철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저 멀리서 열차에 대문짝만 하게 박아놓은 그래피티가 시선을 강탈했다. 고대 동굴 벽화에서부터 그래피티의 역사는 유구하다. 그것들이 가치가 있음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불쑥 만나는 그래피티는 아직도 낯설다. 심지어 차량 전체를 그래피티로 도배해놓은 걸 보면 누구라도 하지 말라고 잡으러 왔어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야경투어 #01

-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숙소에 들러 잠시 쉬고 나오니 조명이 로마 곳곳을 밝히고 있었다. 걸음마다 보이는 다양한 조각상과 건축물은 조명을 가득 품었다. 그리고 마치 연극무대의 배우들처럼 각각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우리는 야경투어의 출발지인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으로 향했다. 로마의 3대 성당 중 하나라는 이 곳은 건립배경부터 남다르다. 로마의 귀족이었던 조반니 부부가 꿈속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의 예언에 따라 한 여름에 눈이 내리는 곳을 찾아 성당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건립 당시 교황이었던 리베리오(Liberius)의 이름을 붙여 한 때 리베리오 대성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성당 내부는 더 흥미롭다. 천장을 가득 메운 황금 장식들과 조각상들이 그것이다. 성당 천장에 격자형으로 장식된 황금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가져온 것을 성당에 헌납한 것이다. 세계사의 일대 사건을 이렇게 대면하니 고등학생 때 수업으로 들었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더욱이 이 곳에는 실제 예수님의 탄생에 사용되었던 말 구유와 피에트르 베르니니의 성모승천 부조가 흥미로움을 넘어 성스러움을 더한다. 이런 장치들로 인해 성당의 내부는 그야말로 '성역'이었다.








야경투어 #02

- 콜로세움으로




일행은 콜로세움으로 이동했다. 골목길을 걸으며 쏟아지는 가이드의 언변에 감탄이 절로 났다. 로마에서 가이드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이드에게 요구하는 정보가 많은 관계로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파리, 마드리드, 런던 등 유럽 전역에 있는 대부분의 가이드들도 지역 역사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지 모른다. 이건 세계사적 측면에서 유의미한 도시를 가이드하는 자들의 숙명 같은 일일 것이다.


콜로세움 앞에 일행이 나란히 앉으니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졌다. 오늘 낮에 숙소를 찾느라 대충 지나쳤던 콜로세움을 가이드와 함께 찬찬히 살펴보려니 공기조차 비장해지고 있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2000)의 배경이 이 곳이었다. 하지만 유혈이 낭자하는 검투사들 간의 잔인한 시합만이 이곳의 전부는 아니었다. 단순히 죽고 죽이는 인권유린의 싸움장 이면엔 정치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 의미를 찾으려면 콜로세움의 건축 배경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콜로세움은 당시 황제였던 베스파시아누스의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폭군 네로의 자결 이후 내전기를 거쳐 혼란스러운 로마의 민심을 하나로 모으고자 했던 그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 바로 콜로세움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완성된 콜로세움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의 아들 티투스의 집권 이후 완성된 콜로세움은 로마의 세력을 국민에게 확인시켜주는 훌륭한 장치가 되었다. 당시 전쟁을 통해 얻은 아프리카의 신기한 동물(가령 하마, 코끼리 등...)들을 풀어놓아 국가의 영토와 위상을 알리거나 노예들을 잔혹하게 죽이는 장면으로 하여금 국민이 간접적으로 로마의 국력을 의식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하지만 콜로세움에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현대의 인권 개념으로 이해하기엔 퍽 어려운 면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맹수, 사람들과 사람들, 사람들과 맹수가 피 터지게 싸우도록 상황을 몰아가는 것과 물불을 가리지 않고 순수 인력으로 연출되는 전투장, 그리고 가끔은 엔딩이 반드시 누군가의 죽음(예를 들어 불에 타 죽는다거나 찢겨 죽는다거나...)으로 끝나는 고대 신화나 전설의 재현은 누가, 어떻게 이런 방법까지 생각해 냈는지 그 발상 자체가 이해하려 할수록 섬뜩하고 잔인한 것이다.


더욱이 그 섬뜩한 유혈의 전투 장면에 열광했던 몇 만의 인물들이 있었다는 점은 인간의 본성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나는 가끔 이런 이야기들을 접할 때마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는 것 같다. 타인의 가학적인 행위를 방관하는 것과 그것을 부추기는 것에 익숙해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야만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했으면서 이래도 되는 건지 의문이었다. 심지어 먼 옛날 콜로세움에서나 있었을 법한 일들이 지금, 서울 모처의 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있노라면 '그럼에도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한 밤에 콜로세움 옆에서 하염없이 가이드의 이야기가 길어졌다. 아마 날이 밝을 때까지 이야기하라면 할 수 있을 듯했다. 그만큼 콜로세움이 대단한 건축물이라는 방증일 것이다.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한번 콜로세움을 바라봤다. 로마의 영광 뒤로 오직 사는 것만을 갈망했을 검투사들의 모습이 교차되어 갑자기 숙연해졌다.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가이드의 이야기가 귓전에 맴돌았다. 그는 최근 콜로세움 옆으로 지하철 공사가 진행되어 콜로세움이 매년 조금씩 기울어 간다고 했다. 역시 영원한 것은 없음을 깨닫는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을 것 같던 로마의 상징이 지하철 개통으로 씁쓸하게 기울어 갈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베네치아 광장으로

- 적막한 포로로마노를 지나며




그렇게 콜로세움의 진한 여운을 뒤로하고 일행은 베네치아 광장으로 향했다. 서늘한 바람에 코끝이 찡해졌다. 이동하는 사크라 거리 아래로 그 옛날 로마의 심장이었던 포로 로마노가 당시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었다. 한 밤에 포로 로마노를 바라보는 느낌은 마치 짧은 예고편만으로 본 적 없는 영화의 스토리를 상상하는 것과 비슷했다. 포로 로마노의 건축물과 조각들은 약탈에 노출되어 온전히 남은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요한 어둠 속에서 먼 옛날의 분주함이 느껴지는 건 나의 상상력 덕분일 것이다. 야경투어의 중반부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로마는 원래 이런 곳인가 보다. 마치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한참 기다렸다며 본인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쏟아내는 수다스러운 친구 같았다. 기대했던 대로 사랑스러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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