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들과 서쪽마녀는 사연을 싣고 ]
It's time to trust my instincts,
Close my eyes and leap!
Wicked, <Defying Gravity>
- Leicester Square 산책
눈을 떴다. 사실 시차때문에 뒤척이다 새벽 4시부터는 아예 잠이 오질 않았다. 시간을 더 낭비하기 전에 숙소의 휴게실에 앉아 무계획을 계획으로 바꾸는 작업을 시작했다. 어디로 가볼까.. 나름의 기준은 있었다. 첫째는 작년에 갔던 곳과는 되도록 겹치지 않을 것, 둘째는 만약 겹친다면 이후 새로운 정보를 수집하여 이전과 다른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곳일 것, 셋째는 관광보단 여행에 부합하는 곳일 것 등이었다.
여행을 오기 전 전원경 작가의 <런던 미술관 산책>을 읽고 있었다. 비행 중에 읽겠다고 패기있게 들고왔지만 수하물로 부친 가방 속에 있는 걸 읽을 방법은 없었다. 멍청한 데는 한계가 없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작품을 감상했다면, 이미 알고 있는 오디오 가이드의 주요 작품 10선만 따라갈 확률이 컸다. 그건 두번째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다. 게 중 다행인 것은 네셔널 갤러리와 관련한 부분은 미리 읽고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부터 결심한 오늘의 여행지는 네셔널 갤러리가 됐다. '새로운 정보로 이전과 다른 가치를 느낄 수 있어야 할 것' 이라는 두번째 기준에 부합하니까 말이다.
네셔널 갤러리로 가는 길에 래스터스퀘어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 곳에는 내가 좋아하는 초코의 성지 'M&M World'가 있고 그 옆으로는 스펀지밥 기념품이 있는 'Nickelodeon shop'이 있다. 사실 나에게는 덕후의 기질이 있어 이 두 개의 컨텐츠 만으로도 한참을 보낼 수 있었지만 이전에 본 것과 크게 변한 것은 없었으므로 아쉬움을 뒤로하고 네셔널 갤러리를 찾아 가본다. 래스터스퀘어에서 큰 레고상점과 래스터가든 공원 사이길로 직진하면 좌측으로 TKTS가 보인다. TKTS는 당일 공연하는 뮤지컬 티켓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티켓부스다.
아침부터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이 티켓부스는 '아, 뮤지컬 데이시트는 빠르게 포기해야겠다.' 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했다. 조금만 늦게가도 줄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지기 때문에 부지런한 사람이 유리했다. 하지만 나는 부지런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뮤지컬을 관람하게 되면 무조건 저녁을 전부 할애해야했기 때문에 그 시간에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들을 놓칠 수도 있었다. 이유야 어찌됐든 여행기간동안 결국 위키드 하나로 뮤지컬 관람을 만족하기로 했다.
- National Gallery를 돌아다니며
TKTS를 지나 세인트 마틴 스트리트를 따라 걷는다. 걷다보면 네셔널갤러리와 트라팔가광장으로 향하는 좁은 입구가 나온다. 더 걷다보면 트라팔가광장, 좌측으로 보면 네셔널 갤러리가 있다. 작년에는 사전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오디오가이드를 대여해서 주요 작품만 따라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전투력을 키워(?)왔다. 머리에 넣어온 게 있었다. 어디 한번 가볼까?
초기 네셔널 샐러리는 East wing 과 West wing 두 개의 건물로 운영이 되었다는데, 그 중에서도 West wing만 사용하다가 점점 소장품이 늘어감에 따라 East wing 사용까지 사용함은 물론이고 최근 본래의 건물에 덧댄 형식으로 Sainsbury wing 까지 신축하여 운영되고 있다. 이 Sainsbury wing에는 주로 13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초기 르네상스 작품들이 전시되어있다.
책에서 본 내용은 이 정도인데 관람객을 위한 갤러리안내 평면도를 보니 East wing과 West wing의 흔적은 없었다. 그냥 큰 건물 옆에 Sainsbury wing 만이 표시되어 있을 뿐이었다. 대영박물관이 700만여점, 루브르박물관이 30만여점인 것에 비하면 네셔널 갤러리는 소박한 편이다. 소장품이 약 2,300여점 점도 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수치도 꼼꼼히 관람한다는 전제가 붙으면 적잖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작품을 알지도 못하고 알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적당한 관람에서 적당한 감동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순백의 미를 뽐내던 작년과는 '확실히' 다른 감동을 느낄 준비가 되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 그럼 들어가보자. 지하2부터 2층까지 있다는데, 어.. 주요작품들은 2층에 모두 모여있다. 다소 나에겐 낯선 구성이다. 보통 꼭 봐야한다는 박물관이나 갤러리를 가면 지하부터 꽉 들어찬 이름있는 작품들이 관람객을 압도하는데, 런던 여행기간동안 다녔던 갤러리들은 건물의 일부만을 쓰고 있었다. 네셔널 갤러리도 그렇고 테이트 모던 갤러리도 그랬다. 가끔 꽉 찬 갤러리들을 관람해야 할 때면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질리는 시기가 오곤하는데, 런던의 갤러리들에선 그런 것이 없다는 점은 큰 매력으로 느껴졌다. 먼저 13세기에서 15세기의 작품들이 전시되어있는 Sainsbury wing으로 들어간다. 1층에는 아트샵과 관람안내도를 나눠주는 데스크가 있었다. 한국어로 '평면도'라고 쓰여진 종이를 하나 집어든다. 타지에서 만나는 한국어는 언제나 반갑다. 그게 이런 대형 갤러리라면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보통 네셔널 갤러리에 관광객들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기대하는 작품은 고흐의 <해바라기> 일 것이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해바라기>가 대단한 작품임에는 이견이 없지만, 네셔널 갤러리에는 <해바라기>와 비견될만한 숨은 보석들이 제법된다. 오늘은 그 보석들을 구경하러 온 것이므로 제일 먼저 <해바라기>를 찾진 않는다. 들어와서 먼저 관람하게 된 작품은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의 <비너스와 마르스(Venus and Mars)> 이었다. 곯아 떨어진 전쟁의 신 마르스(Mars)와 그의 옆을 지키고 있는 미의 여신 비너스(Venus)로부터 평안함이 느껴진다.
이 작품의 신스틸러는 사티로스(반인반수의 숲의 정령)인데, 양 쪽으로 늘어진 비너스(Venus)와 마르스(Mars)의 사이에서 투구와 창, 소라고둥을 가지고 한껏 장난어린 표정으로 마르스(Mars)를 쳐다보고 있다. 심지어 마르스의 옆에서 소라고둥을 불기위해 볼을 빵빵하게 만든 사티로스의 모습에선 마르스(Mars)가 이번 고비(?)는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전쟁의 신이 미의여신 앞에서 정신없이 자고있는 이 장면은 '이유극강(以柔克剛,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을 느끼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장면 속 비너스의 모습은 다소 불편해 보인다. 그녀의 눈을 보면 마르스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비너스는 뭔가 할 말이 있다. 마르스는 그걸 모른다. 전쟁만 아는 이 건조한 남자는 비너스의 속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는 것이다. 비너스가 이긴걸까? 아님 마르스가 이긴걸까? 알 수 없는 이 불륜남녀(비너스의 남편은 마르스가 아니고 헤파이스토스다.)의 미묘한 신경전은 이 작품의 재미있는 관람포인트가 되었다.
보티첼리의 그림을 지나 라파엘로의 작품을 만난다.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보숭보숭한 면이 있다. 아기의 살결같이 부드러운 붓터치는 섬세하고 아름다워서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마다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라파엘로가 그림을 그렸다는 것도 이슈거리가 되지만 '누구를 그렸냐'는 것도 주목해 볼 만 하다. 주인공은 교황 '율리오 2세'로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고 그와 정말 유사한 모습에 모두 놀랐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교황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교황'이나 '왕'과 같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자고로 머리 한 올도 신성하게 미화하여 그렸어야 하거늘, 라파엘로의 작품은 영락없는 현실의 '인간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제로 '율리오 2세'는 하나님의 대리인이라기 보다 독재자에 가까웠고 고집불통의 늙은이었다. 오죽했으면 그가 미켈란젤로와 친분이 있는 이유가 '비슷한 성격'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파엘로가 율리오 2세의 퉁퉁한 표정과 꽉 다문 입, 울퉁불퉁한 눈썹을 사실적으로 그려놓고도 무사했던 것을 보면 그는 라파엘로를 굉장히 총애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예술인들의 후원자이기도 했기 때문인데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천지창조)>를, 라파엘로에게 <아테네학당>을 의뢰한 인물도 율리오 2세라고 하니 어쩌면 이 고집불통 노인에게 깊이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버건디 색상의 벽면에 걸린 이 작품은 신선한 초록색의 배경과 붉은 교황의 의상이 대비되어 더욱 모던함이 느껴진다. 요즘 작품들과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는 색감은 이 작품을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옮겨가본다. 이른시간 네셔널 갤러리 곳곳에서는 꼬맹이들이 가끔 올망졸망 앉아 있는데, 이걸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선생님의 인솔하에 작품설명을 듣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데 가끔 이 전시관을 굴러다니는(?) 애들도 있고 열심히 선생님 말씀을 듣는 꼬꼬마들도 있다. 어딜가나 애들은 비슷하다. 가끔 이 친구들은 엉뚱하게 갤러리의 어느 작품을 따라그리는 것 대신 마루바닥을 그려가기도 하는데(보고있는 나도 당황스럽다.) 선생님이 크게 뭐라하진 않는다. 이렇게 미술관에서 굴러다니며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신선한 충격으로 여겨지는건 나뿐일까? 우리나라에서는 꼬맹이들이 각국의 관광객과 함께 굴러다닐 갤러리도 별로 없지만 만약 유치원 꼬맹이들이 공공장소에서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면 어떤 어른이라도 미간을 찌푸릴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미안해졌다. 나도 조용한 어린이를 선호하는 입장에서 너무 꼬맹이들에게 가혹한 공공장소 예절을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꼬맹이들을 뒤로하고 다소 섬뜩한 작품 앞에 선다. 프랑스의 역사화가인 폴 들라로슈의 작품인 <제인그레이의 처형>이다. 사실 우연히 쉬어가려고 앉을 곳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이 작품 앞에 빈 벤치가 생겼다. 섬섬옥수의 고운 여자가 눈을 가리고 손을 더듬거리며 무언가를 찾고있다. 드라마틱한 이 장면은 헨리 7세의 증손녀인 제인그레이의 처형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메리의 쿠데타로 단지 9일간만 왕좌에 앉을 수 있었던 제인그레이는 런던탑에 감금되어있다가 십대에 처형을 당하고 만다. 사실 당시 메리가 쿠데타로 왕권을 장악 후 제인그레이를 처형까지 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종교적 신념때문에 메리의 개종 제의를 거부하면서 처형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군대에서 초코파이에 따라 개종하던 가벼운 나의 친구들이 갑자기 생각나는건 왜일까? 그녀의 나이가 17세, 왕족이었기에 그랬을까, 어린나이에 신 앞에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장면은 일반적인 나의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만 이런 감정을 느낀 건 아니었는지 그녀의 좌측으로 그 장면을 차마 보지 못하고 등을 돌린 유모와 그 아래로 시선이 풀린 시녀의 모습이 보인다.
제인그레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이들의 장면 속에 섬뜩하게 도끼를 든 망나니와 그녀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사제의 모습은 그녀를 더욱 가엾게 만드는 장치들이다. 비슷비슷한 작품들을 넘어 지루함이 몰려 온다면 이 작품 앞에 가는게 특효약이다. 잠이 깬다. 이 긴장감과 애처로운 소녀의 운명때문에....
이 외에도 재미있는 작품이 많았다. 물론 막판에 본 해바라기도 그렇고... 이 해바라기 앞엔 항상 사람이 많다. 다들 유명하니까 한번 보러 온건지 정말 저 작품 심연에 있는 어떤 것을 느끼기 위해 온건지 알 수는 없다. 엄청난 심오함을 느끼지 않아도 좋다. 관람에서 각자 느끼는 것은 분명히 있다. 그게 대작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고...
가끔 나는 이렇게 큰 갤러리에서 그것도 대작 앞에서 심오하지 않거나 전문적인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관람평을 여과없이 표현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보곤 했다. 이 태도는 그닥 오래가진 않았다. 왜냐하면 최근 나의 무식함이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선을 그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켠엔 진지충같은 면이 있긴 하다.
갤러리 안에서 퐁파두르부인의 초상 앞에 있을 때였다. 여학생 둘이 "이 여자 진짜 볼이 발그레한게 예쁘게 생겼다, 사진찍어야지~"라며 관람 중인데 해맑게 사진을 찰칵찍었었다. 사실 이 작품은 퐁파두르부인이 폐렴으로 죽기 전 마지막 초상으로 사진찍기 이전에 안타까운 감정이 먼저 있어야 하지만 이 해맑은 학생들이 그런걸 알리가 있나, 예쁘고 통실하게 그려지긴 했으므로 그들의 감상에 공감해준다. 여유를 가지고 관람을 하면 한결 가벼워지고 타인을 보는 눈이 부드러워진다. 너무 무거운건 좋지않다는걸 새삼느낀다. 몸도 마음도...
- WASABI에서 찾은 최적의 비율
런던 시내를 걸어다니면서 간간히 눈에 띄는 음식점이 있었다. 와사비(WASABI)가 바로 그곳이었는데, 편의점처럼 자주보이는 음식점이다. 들어가면 연어롤과 초밥등을 판매한다. 몰랐는데 유럽에오니 초밥용 '쌀'을 따로 판매하고 있었다. 보통 유럽의 쌀은 길이가 길고 푸석해서 맛이 없는데 그걸로 초밥을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이 초밥용 '쌀'을 가지고 만든 와사비의 음식들은 맛보진 않았지만 일본이나 한국의 초밥과 유사하게 생겨서 이곳에서 고국의 맛(?)을 느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원래 영국의 과일이나 작물들은 땅속에서 자라는 품종(감자나 고구마)을 제외하곤 맛이 없다는 것이 정설인데, 최근에는 와사비처럼 현지화가 잘 된 음식점들이 많아 런던 어딜가도 망할 우려는 없다. 네셔널 갤러리를 돌아다니느라 배가 고파져서 도시락을 한 개 사들고 숙소로 돌아간다. 당장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숙소에 가면 라면이 있었으므로 최적의 조합을 위해 때를 기다린 것이다. 아보카도와 연어, 새우튀김이나 게맛살을 넣은 김밥과 초밥 몇 개로 구성된 도시락이었다. 유럽에서 스시를 먹고 한번도 만족한 적이 없었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에서도, 해산물이 풍부한 핀란드에서도 밥과 회의 비율이 영 어정쩡한게 먹고도 역시 어딘가 엉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숙소에 돌아와 급하게 컵라면을 하나 들고와서 물을 붓고 기다린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다. 입이 심심하므로 초밥 한 개를 먹어본다. 캬.. 이맛이지! 이맛이다. 여태까지 유럽에서 먹은 초밥 중 가장 회와 밥이 적당비율로 뭉쳐진 작품이다. 어쩐지 내 입맛에 맞는다 싶었는데 와사비는 이름과 다르게 한국인 사장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안타깝지만 유럽인들에게 홍보하려면 와사비가 더 먹히나 보다. 하긴... 고추장과 된장은 어쩐지 그들에게 조금 생소할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추운 곳에서 막 들어와 따듯한 라면과 함께 먹는 롤과 스시는 몸과 마음을 모두 풀어지게 했다. 먹고나서 부푼 배를 안고 침대로 갔다. 왜냐하면 위키드 관람전 체력비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몸도 따듯했고 침대도 폭신하고... 그래, 이곳이 지상낙원이었다.
- 뮤지컬 위키드(WICKED)
작년에는 레미제라블을, 올해에는 위키드였다. 서쪽마녀에 대한 오해를 풀 수 있는 이 뮤지컬은 언제봐도 다양한 메세지를 던진다. 사랑과 우정 외에도 독재 속에서 피우는 정의와 의협심 등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유명 넘버인 <Defying Gravity>는 이미 수 많은 뮤지컬 배우들에 의해 재탄생되었다. 이전에 브로드웨이팀 내한공연 당시 컨디션이 안좋았던 건지 <Defying Gravity>가 시원한 느낌이 없었는데, 런던에서 본 새로운 엘파바가 시원하게 이 곡을 소화하며 1막을 마무리 했다.
사실 1막이 마무리되기 전에 사건이 있었다. 중간에 엘파바가 노래를 하다가 스태프 손에 이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문제가 생겨 잠시 공연을 중단한다. 곧 다시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기약없는 기다림에 관람객들이 웅성거렸다. 그래도 다들 여유있게 기다린다. 몇 분 후 다시 공연이 시작됐다. 엘파바가 이 공연에 집중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가운데, 무사히 1막을 끝내고 관객들이 큰 호응으로 화답했다. 2부가 마무리 되고 잠깐의 이벤트시간이 있었다. 누적 관객 수를 갱신하여 축하하는 이벤트였다. 이런 이벤트들은 웨스트엔드의 뮤지컬이 꾸준히 장기간 공연된 성과일 것이다.
뮤지컬 한 편이 장기간 걸려있어 애호가라면 언제든 관람할 수 있는 이 환경은 일관되게 부럽다. 각 공연마다 전용관이 있어 무대장치와 관련된 전문성도 보유하기 용이한 구조라는 것도 큰 장점인 것 같다. 우리나라의 공연장들은 지속적으로 공연에 따라 무대장치를 바꿔야한다. 이 점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안정성 측면에서 런던의 공연시장이 더욱 메리트가 느껴지는건 어쩔 수 없다.
공연이 끝나고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린다. 위키드 전용관은 피카딜리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곳에 있어 지하철을 타고 이동해야했다. 더 많은 공연을 보고 싶었는데 한 개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은 안타깝다만, 야밤에 다니는 런던거리는 뮤지컬만큼이나 아름다우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숙소 인근 코벤트가든역에서 비를 맞으며 걷는 길, 내일은 제발 따듯하기를 기도했지만 보란듯이 다음날 날리던 눈발은 내가 할말을 잃게 만들었다. 런던에서 보기 힘들다는 눈을 맞은 내가 행운아일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추웠으므로 이걸 행운이라 해야할지 난 잘 모르겠다. 많이 추웠다.
[참고자료]
- 전원경, <런던 미술관 산책>
#주절거림
아... 아침부터 왜이렇게 조회수가 많은지 이상하다 싶었는데
(저는 브런치 시스템이 고장났나... 생각하고 기대도 안했었거든요 -_-...)
근데!
제 글이 다음메인 스페셜에 걸렸군요 .. 세상에...이럴수가.. 난생 처음이예요..
감사합니다. 땡큐우! 어디에 감사해야하죠? 어쨌든 감사합니다.